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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movie review

하하하 (2010, 홍상수)_역시 '여자는 남자의 미래(?)'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6. 8.

<하하하>

감독 : 홍상수
출연 : 김상경, 유준상, 윤여정, 김강우, 김규리, 예지원, 문소리


두 남자가 이야기하는 여름 통영의 이야기들. 캐나다로 이민을 결심한 문경(김상경)은 선배 중식을 만나 청계산 자락에서 막걸리를 마신다. 둘 다 얼마 전 통영에 각자 여행을 다녀온 것을 알게 되고, 막걸리 한잔에 그 곳에서 좋았던 일들을 한 토막씩 얘기하기로 한다.

 문경의 이야기. 통영의 관광 해설가, 성옥. 통영에 계신 어머니(윤여정) 집에서 묵게 된 문경은 통영을 쏘다니다가 관광해설가인 성옥(문소리)을 만나 그녀를 쫓아다니기 시작한다. 성옥의 애인이고 해병대 출신인 정호(김강우)와 부닥침이 있지만, 끝내 성옥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하고 같이 이민을 가자고 설득까지 하게 된다.

 중식의 이야기. 통영에 같이 온 여자, 연주. 중식은 결혼했지만 애인 연주(예지원)가 있고, 함께 통영에 여행을 왔다. 애인은 중식에게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 할 것을 요구하면서 중식은 괴로워한다. 통영에 내려와 있는 시인 정호와는 친한 사이라 거의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어울려 다니면서 정호의 애인인 아마추어 시인 성옥과도 알게 된다.

 안주 삼아 여름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던 두 남자, 그러나 알고 보니 그들은 같은 사람들을 만났던 것! 오직 좋았던 일만 얘기하겠다는 두 남자의 만담 같은 코멘트가 청량한 통영에서 일어난 두 커플과 우울한 시인의 만남을 미묘한 댓구의 그림으로 완성해나간다.

전국 지방도시를 순회하며 영화 배경으로 삼는 홍상수 감독의 이번 여행지는 바로 '통영'이다. 여름날 통영에서 복죽을 먹었던 공통의 기억을 가지고서 막걸리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 한 자락씩 굽이 펴 나가는 두 남자의 대화가 이번 영화의 줄기다. 정작 그 둘은 모르는 엄청난 인연이 곳곳에서 이어져 나가고 있었더라는. 그 사이에는 하릴없어 보이는 남자들의 히히덕거림이 있고, 술이 있고, 비가 있고, 시가 있고, 또 가장 중요한 여자가 있었더라는.



남녀사이, 그 오묘하면서도 일방적인 관계에 대하여

언제나 그렇지만 현실계 남녀관계의 오묘함을 홍상수 감독만큼 제대로 풀어내는 사람이 또 있을까. 예쁜 여자 보면 눈을 못 떼고, 사랑하는 여자 집의 담을 넘고, 또 사랑하는 여자에게 시를 써 선물하고 못 먹는 순대를 입에 넣고 씹기도 하는 남자들이 있고 이런 남자들과 사랑해야 하는 여자들이 있다. 여자들은 남자를 사랑하기 위해 술잔도 부딪혀 줘야 하고 남자들끼리 티격태격할 때 말려줘야 하고 울면 안아줘야 하고 자신의 전남친한테서 처맞고 피를 흘려도 잘 참았다며 '당신 정말 최고야!'하면서 엄지손가락도 치켜 올려줘야 한다.
이번 영화에서는 연인 관계뿐만 아니라 모자 지간에 대한 묘사도 이루어진다. 아들은 엄마의 옷이 야하다며 가장 노릇을 하려 들고 이에 진노한 엄마는 옷걸이(!)로 다큰 아들의 종아리를 때린다. 아들은 울음을 터뜨리고 엄마는 결국 영화의 끝부분에 가서는 '불쌍한 내 새끼' 하며 울고 만다. 영화 속 여자들은 끊임없이 남자들을 거둬 먹이고 감싸고 옹호하고 믿어 주고 옆에 함께 있어 준다. 또 그녀들은 관대하고 냉철하며 합리적이고 생활력이 강하다.
 
그에 비해 홍상수 감독 영화의 남자들은 어째 점점 유아기로 퇴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하하>의 두 주인공 중 조문경(김상경)이 특히 그렇다. 쉽게 감탄하고 기분 좋아지고 싸우는 걸 싫어하고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주고 싶어하는, 다 큰 몸을 지닌 어린 아이같은 모습을 보이는 조문경은 영화 속에서 가장 순수한 인물로 그려진다. 조문경이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내뱉는 대사는 '기분이 너무 좋더라', '당신 예뻐요', '너무 귀여워' 등과 같은 1차원적이지만 한없는 긍정의 언어들이다. 이렇게 아이와 같은 상태에 있는 남자와 반대지점에 놓이는 인물로서 영화에 등장하는 것은 바로 '성웅 이순신 장군'이다. 뜬금없이 이순신 공원의 벤치에 떡 하니 앉아 위엄있는 풍채를 자랑하는 이순신 장군과 그를 보고 두 손을 맞잡고 감격스러워 촐싹대는 문경의 모습은 과거 '영웅'이라 불리었던 남자와 오늘날 나약하고도 순수하고 찌질한 현대사회의 남자가 얼마나 대조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들의 지닌 남성성의 차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문화가이드인 성옥(문소리)인 것 같다. 그녀는 한 관광객이 이순신의 업적을 의심하는 듯한 뉘앙스의 질문을 던지자 '당신같은 남자는 지금 이순신 장군을 만나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거다. 눈이 부셔서' 라며 거품을 물 정도로 열변을 토한다. 성옥에게 남자는 그런 존재여야 했다. 이순신 급은 못 되더라도 건달이든 공수부대든 해병대든 '쎈' 남성에 대한 로망이 그녀 안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문경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이유는 단순히 그가 전 남친과는 비교도 안 되게 '잘 해서'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행복은 도덕과 윤리 바깥에 있는지도

영화가 끝날 때 모든 남자들은 '하하하' 하고 웃는다. 하지만 그 중에서 정말 해피엔딩을 맞은 사람은 누구일까 궁금하다. 아이와 부인을 두고 사랑하는 여자(예지원)와 희망찬 미래를 약속하는 중식(유준상)일까, 다 빼았겼지만 웃어넘길 줄 아는 낙천주의자 문경일까, 아니면 떠내보냈던 연인으로부터 다시 연락을 받고서 기뻐하는 정호일까. 영화의 마지막, 중식과 연주는 가장 행복한 얼굴로 서로가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듯이 대화를 나눈다. 유부남과 미혼녀, 어찌 보면 도덕적으로 용인받지 못할 위치에 있는 그들이지만 달리는 버스 안에서 함께 시를 읽으며 행복해 하는 표정은 지금까지 다른 인물들이 보여준 모든 사랑, 시, 본질, 실존주의, 과거의 영웅, 아파트 모든 것을 다 뒤덮어 버리고 만다. '그 여자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본 적 한 번도 없다'며 으스대는 젊은 정호나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뭐'라고 웃어 넘기는 문경과는 차원이 다른 진정성이다. 연주의 휴가가 끝나고 그들이 어떠한 벽에 부딪히게 된다고 해도 모든 불가능을 불식시켜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과 힘을 가진 행복한 감정이다. 인간은 흔히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 준다는 '도덕'이나 '윤리'로부터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행복해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 용기가 필요한 순간 적당한 '술'과 '비'는 상당히 큰 도움이 된다.



So, All You Need Is Love

결론적으로 이 영화 안에서 '순수'는 배반당한다. 매사에 '허허허'로 일관하던 순수의 결정체였던 남자 문경은 결국 모든 걸 빼앗기고 만다. 그가 가질 뻔한 사랑하는 여자, 아파트 등 모든 걸 차지한 건 어둠의 상징인 시인 '정호'(김강우)였다. 그리고 순수한 문경의 모습에 마음을 열었던 여자 성옥은 결국 '잘 생기고 싸움 잘 하는(쎈)' 전남친(정호)에게 다시 돌아간다. 아내와 아이를 두고 애인과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중식(유준상)은 영화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모습으로 해피엔딩을 맞고, 자기 좋다는 여자들 안 막고 사랑한다는 말도 결코 하지 않는 이기적인 남자 정호는 다시 성옥을 갖게 되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주변의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결국은 행복해진 것이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이기적이라고 욕하기에 이 세상은 이미 '사랑'이라는 것의 존재조차 너무나 희귀해졌다. 어떻게든 그들이 선택한 사랑을 지지해 주고 싶어진다. 그들은 모두 부족하고 모순적이고 비겁하고 가식적이고 못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or Women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인물의 경우 사랑에 안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항시 불안해 하고 다른 이성에게 흔들리며 상대방을 의심한다. 하지만 이제 홍상수 감독이 보기에 남자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여자라는 건 확실해 보인다. 여자들에게 있어 남자들은 언제나 아이 같고, 잘못하더라도 업어주고 싶고 울면 안아주고 잘못하면 때려주고 밥을 챙겨주고 침맞을 때 옆에 있어주어야 하는 대상이니까. 그녀들에게 남자는 나이가 많든 적든 모두 아들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 못난 아들들을 여자들은 끊임없이 얼르고 달래고 부추기고 중재하고 감싼다.
(특히나 모성애의 최고봉은 바로 윤여정이 연기한 문경의 엄마다. 정이 많고 화통해서 조금만 마음에 들면 아무나 양녀, 양자로 삼아버리는 버릇(?)이 있는 그녀에게 남편은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골칫덩이였다. 아들을 키우며 그만큼 자수성가하는 동안 그녀의 남편은 무능한 또 하나의 아들에 지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모두들 인정하듯이 지금까지 보았던 홍상수의 영화 중 가장 유쾌하고 발랄한 작품이다. 그리고 하도 인물들끼리 서로 얽히고 설키니 저러다 큰일나지~ 싶어 조바심치는 스릴감(?!)까지 충만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홍상수 영화를 보며 울어 본 것도 처음이다. 내 두 눈을 가지고 예쁜 것들만 보면서 충분히 살 수 있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할까. 성옥은 문경과 함께 떠날 수 있었는데 왜 주저앉고 말았을까. 문경은 왜 그녀를 잡거나 이유를 묻지 않았을까. 왜 이리도 우리는 비겁한가.
결국 집으로 오는 길에 맥주를 사와서 혼자 마셨다.


P.S.
역시 가장 인상적인 건 왕성옥을 연기한 문소리의 연기다. 그녀의 연기력의 끝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호들갑스럽고도 순수한 경상도 아가씨의 말투를 완벽 소화, 그녀가 늘어놓는 엉뚱한 짓까지도 문경의 표현처럼 '너무나도 귀여운' 모습들이다. 나랑은 너무도 달라 감히 '사랑스럽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그런 애교 넘치는 은근한 속물녀자가 그동안 문소리가 보여주었던 역할 중 가장 발랄하고 붕붕 떠다니는 캐릭터가 아니었을까. 쾌활하고 적극적이며, 다른 여자랑 모텔에서 나오는 남친을 기어이 업어주고야 마는 특이한 성격의 여자, 왕성옥이라는 캐릭터가 문소리에게 그토록 잘 어울리다니. 덕분에 영화가 무척 즐거웠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