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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movie review

<아저씨>상업영화와 장르영화 사이에서 찾은 절묘한 타협점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8. 3.



성급한 일반화로 판단했었던, 그러나 만나보니 제대로 된 강렬한 맛을 내던 영화

 예전에 TV에서 암벽등반을 하는 분들에 대한 다큐를 본 적이 있다. 그걸 보면서 나는 일부러 목숨을 거는 행동을 왜 할까라는 생각만 들었다. 이처럼 무엇을 한다는 행위에 대한 가치 판단은 이처럼 주관적인 생각이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기준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중요도를 매긴다. 보편적인 기준을 본다거나 사실적 정보를 우선하기 보다는 자기만의 기준으로 재단하고 평가하곤 한다.

 영화를 보는 행위도 역시 비슷하다. 보고서 판단하는 것이 아닌,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재미나 작품성에 대해 스스로 선을 그어버리고 예단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예고편이나 포스터 등의 사전 정보를 통해 판단하는 것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애들이나 보는 것, 또는 유럽영화는 지루하다 같은 성급한 일반화에 의한 판단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아저씨>를 보기 전에 이런 일반화의 오류를 범했다. 제목이 진부하다고 생각을 했었다는 것이 가벼운 수준의 일반화였다면(사실 보통의 사람들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조금 무거운 수준의 일반화는 영화가 <레옹>, <테이큰>, <맨 온 파이어> 등 비슷한 스타일의 영화를 어설프게 차용한 후, 원빈이란 스타를 넣어 적당히 우려낸 잡탕 정도로 생각했던 점이다. 그러나 내가 맛본 것은 잡탕이 아닌, 제대로 된 뜨겁고 매운 육개장이었다. 너무나 강렬하면서 화끈한, 예상하지 못했던 얼얼함.


연출과 연기가 만들어 낸 보편적 공감

 영화는 마약을 홈친 여성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이 발단이다. 마약을 되찾으려는 조직은 훔친 여성과 딸을 납치하는데, 딸과 친한 옆집 아저씨가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병기 급의 존재로, 그가 사건에 개입하게 되면서 잔혹한 피의 복수을 부른다는 이야기.

 <아저씨>의 형식은 앞에서 언급한 작품들의 차용이란 면에서 본다면 연장선에 있다. <레옹>의 최고의 킬러나 <테이큰>의 최고의 특수요원 등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건드렸는데, 알고 보니 그 뒤에 상상도 할 수 없는 강력한 존재가 있었다는 설정의 차용. 관객에게 우연적인 면을 호소하는 진부한(또는 과도한) 면은 분명 있는 설정이다. 그러나 영화적으로는 아직 유용한 설정이기도 하다. 구하려는 의지가 강할 수록, 관계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역설적인 면이 선명할 수록, 관객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는 설정이니까.

 그런데 영화는 단순한 차용에 머물기 보다는 앞 선 작품들을 영리하게 변형을 가했다. <레옹>의 감정과 <테이큰>의 쾌감 사이의 절묘한 접점을 찾은 것이다.

 태식은 전당포에서 자신을 가둔 채 살아가는 남자. 과거의 슬픔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어쩌면 전당포라는 공간은 세상을 버린 채 살아가는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장소일지 모른다. 창살로 가둔 채 타인을 바라보는 어둡고 탁한 공간. 그런 공간에 들어온 소미. 그녀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존재다. 그런 소미에게 서툴면서도, 낯선 사랑을 표현하는 태식. 태식과 소미는 소통하는 유일한 단 하나뿐인 친구다.

 태식과 소미의 관계 설정에서 소미에게 중심을 둔다면(아마 태식과 동등한 정도의 중심이 맞을 듯 싶다) 심리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저씨>는 철저하게 '아저씨'란 인물에 중심을 둔다. 태식(원빈)과 소미(김새론)의 소통적 관계를 소극적으로 활용하며, 태식이란 인물 자체가 가졌던 폭발성을 활용한다. 감정의 활용을 통한 슬픔보다는 진혹한 복수의 쾌감에 무게를 둔 선택. 그러나 복수를 선택한 영화가 복수를 다루었지만 실패했던 영화들과 다른 점은 연출과 연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태식이란 인물에 공감하고 납득할 만한 전개를 해주는 연출과 그가 가진 과거의 무게를 관객이 느낄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연기. 연출과 연기가 만들어 낸 공통 사이에는 보편적 공감이 있다. 그럴 수 있다는 공감대의 형성.

 보편적 공감이 있기에 태식이 소미를 구하는 이유가 단순하지만 납득이 된다. 내일이란 걸 모르고 살아가는 자에게, 간직하고 싶은 희망을 만들어 준 소녀. 그녀를 위험에서 구하겠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복수의 이유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도리어 이 점이 마음에 들었다. 구구절절 설명을 하지 않으며 단순화한 흐름 속에서 인물을 보는 시각. 도리어 태식의 집요하고 처절한, 마치 자식을 향한 맹목적인 사랑에 가까운 모습을 정신적 측면에서 이해하고 싶었다. 자신 속에 분노를 가두고 살아간 남자. 폭발할 기회가 없었던, 모든 것을 차단했던 삶. 억누르고 참아온 분노가 일순간에 폭발을 하는 모습. 가장 설명이 필요 없는 감정이 사랑이라면, 그 반대적인 감정인 분노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장르적 탐구와 상업적 색채의 적절한 타협

 태식의 감정을 중심으로 구성한 <아저씨>는 인물간의 관계에 대한 영화라기 보단 태식이란 인물 자체를 보는 영화다. 행동을 통해 이야기의 타당성을 구성하는 것이 아닌, 장르적 탐구를 한다.

 초 중반까지는 특히 그 탐구가 강하다. 상업영화로서의 친절함 보다는 장르적 탐구에 더 집중한다. 설명보다는 유추, 묘사보다는 생략이 많다. 그러나 후반은 철저히 상업영화의 색채를 가졌다. 상세한 설명, 대사를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인물들, 그리고 홍콩무협물에나 나올만한 장면의 삽입. 이런 자본과의 일정 타협점으로 나온 장면들은 개인적으로 장르적 색채의 퇴색, 캐릭터의 훼손이기에 일정 부분 실망스럽고, 안타까웠다. 하지만 상업영화라는 측면에서는(특히 한국영화에서) 이해가 가는 측면이 들었고(이 부분에서는 올 초 개봉한 <의형제>에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흥행성과 작품성 사이에서 찾은 절묘한 타협점의 결과물이란 느낌이 컸다. 

 그러나 영화는 상업적 타협으로 인해 손해만 보는 모습은 아니었다. 흥미로운 점은 타협을 한 후반부에서 전개는 타협할지 언정, 전개의 표현 강도는 상당하다는 사실. 액션의 밀도가 가진 세밀함과 피의 농도가 가진 짙음은 근래 한국 영화가 보여주기 힘들었던 수준이었다. 더욱 흥미로웠던 부분은 농도를 진하게 하는 것만이 아닌, 우회적 표현을 곁들인 점이다. 다양한 묘사를 통해 단지 잔혹함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 인물을 중심으로 초점이 가길 원했던 감독의 노림수가 돋보이는 대목으로 영화 흐름의 완만에 상당한 신경을 썼음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아쉬운 점은 후반부의 진행. 태식의 정체를 조금 더 모호하게, 조금 더 흐릿하게 하면서 감정적인 면에 충실했으면 어땠을까? 물론 상업영화로서 그럴 수는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이정범의 재발견과 원빈의 성장은 올해 한국 영화의 수확이다

 <아저씨>의 성과는 상업영화의 틀에서 감독의 생각과 의지가 보인다는 점이다. 장르적으로 훼손을 덜하면서, 적당한 수준의 타협으로 얻어낸 뛰어난 성과물. 멋진 결과물을 보고 나니, 이정범 감독의 전작 <열혈남아>가 보고 싶어졌다. 단지 홍콩영화와 제목이 같다는 이유로 외면했던 것이 너무나 미안하다.

 원빈은 <마더>에서 연기의 각성을 하며 한 단계 성장을 했음이 확실하다. <마더>이전과 이후의 원빈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 성장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약간의 모험이 담긴, 거의 혼자 이끌어가는 <아저씨>를 선택한 듯 하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결코 나쁘지 않았던 선택이 되었다. 결코 옆집 아저씨 같지 않은 이미지의 원빈이 만들어낸 역설적인 아저씨의 모습이기에 더 인상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이정범의 재발견과 장르 탐구가 이룬 성과, 그리고 원빈. 이 성과들은 2010년 한국 영화가 거둔 수확들 중 하나일 것이다. 상업적으로, 작품적으로 완성도를 이룬 영화이며, 선뜻 다루기 힘든, 잘못하면 엉성한 이야기나 말도 안 되는 액션으로 일관할 만한 소재를 한국적으로 잘 소화해 낸 <아저씨>. 올해의 한국 영화 중 한 자리를 차지할 만한 작품으로 충분하다. 그렇기에 극장에서 <아저씨>를 보시길 적극 추천하고 싶다. 단, 잔혹한 장면이 있으니 그런 부분에 약한 분들은 유의했으면 한다.

★★★

*2010년8월4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