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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movie review

<죽이러 갑니다>한국 영화 초유의 장르 전복 시도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 13.

 <죽이러 갑니다>에 한국 영화 '사상 초유'라는 다소 부담스러운 지위를 일단 주고 싶다(물론 장편 기준이다). 이토록 황당한 영화를 만난 기억이 있었던가 곰곰 생각해보았다. 한국 영화에서는 처음 느껴보는 관습과 구성을 무시한 전개에서 느껴지는 호기 또는 무모함. 여기서 의심을 할 필요성은 있다. 단순히 한 작품에서 보인 장난기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닌가, 다른 영화와 다른 어떤 영화적 메시지가 존재하는가, 라는 의문. 이것들은 당연히 짚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감독에 대한 의구심은 잠시 접어두어도 괜찮다. <죽이러 갑니다>만을 보았다면 의문을 가졌겠지만, 박수영 감독은 2010년 개봉작 <돌이킬 수 없는>을 만든 감독이란 점을 상기해야 한다(만든 순서는 <죽이러 갑니다>가 먼저다). <돌이킬 수 없는>은 높은 완성도에는 의문은 가질지언정, 기본기에선 일정 수준을 보여주었던 작품이다. 눈여겨볼 점은 <죽이러 갑니다>와 <돌이킬 수 없는>은 시간적 연결고리만이 아닌 내용적인 공통성이 있다는 점이다. 

 <돌이킬 수 없는>은 사람(사회)들이 가지는 이기주의적 시각에 대한 문제 제기가 담겨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은 전과가 있는 사람을 잠재적 범인으로 몰아가는 집단적인 시각과 선입견의 오류에 대한 강한 비판을 제기했었는데, 이런 시각은 <죽이러 갑니다>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전반부에선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와 기득권을 가진 기업가 가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계급적, 사회적 충돌은 <돌이킬 수 없는>의 세진을 둘러싼 이기주의적 행동-시각과 유사성이 보이며, 후반부에서 선의로 했던 행동이 집단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는 <돌이킬 수 없는>의 세진의 행동이 불러온 반작용과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단지 <돌이킬 수 없는>과 <죽이러 갑니다>의 차이라면 하나는 장르에 충실한 스릴러고, 다른 하나는 장르적 구조를 파괴해버리는 블랙코미디다.

 박수영 감독은 중심적인 사건을 전반과 후반으로 나누면서 형식 역시 방점을 다르게 찍는 시도를 했다. 전반부는 대사를 통한 직접적 메시지 전달이 강하다. 슬래셔 무비를 연상케하는 과감한(높은 수준의 질감을 기대하지는 마시길) 피와 살의 성찬을 보여주고, 동시에 노동자와 사용자의 입장은 대사로 직접 표현한다. 여기선 어처구니없는 상황 속에서 던져지는 진지한 대사들이 웃음을 준다. 후반부는 전반부와 또 다르다. 흡사 중국 무술 영화의 대결 구도를 차용한 느낌이 드는 구조에, 호러의 아이콘인 <이블데드>를 연상케 하는 장면들이 삽입되어 있다. 이것들이 만나는 화학반응은 놀랍도록 황당하다. 특히 마지막 배달부와 사장의 대결은 화학반응 결과물의 엑기스로 모든 장르적, 관습적 상황은 붕괴되고, 배우들은 혼돈의 춤을 춘다. 관객은 어이없어서(아니면 황당해서) 웃음을 짓게 된다. 어쩌면 이런 엉망진창은 무엇인가, 라며 화를 낼 수도 있다. 

 <죽이러 갑니다>같은 기승전결 구조와 장르적 작법을 완전히 파괴해버린 B급(비약하자면 Z급이란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른다)정서의 영화가 적은 관이지만 정식 개봉의 절차로 대중에게 선보인다는 사실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의미 부여 방향을 조금 달리해 영화 속 대사를 변형하여 인용하겠다. <죽이러 갑니다>는 관객에게 장르 해체의 실험을 감행했다. 당신은 웃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가, 라고  영화는 묻는다. <죽이러 갑니다>의 전복적 시도는 한국은 이런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인가, 라는 태도의 문제, 수용의 자세를 꺼낸 것이다. 

 그리고 미래를 지켜볼 감독의 리스트에 박수영을 추가해봄 직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문득 연상되는 이름은 신정원. <차우>의 신정원 감독이 메이저 영화에서 독특함을 보여주었다면, <죽이러 갑니다>의 박수영은 열악한 독립영화에서 보여주었다. 관습과 예상을 붕괴시키는 통제와 질서를 벗어난 감독들이기에 이들을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한국영화 폭을 넓히고 있는 도전자들이다. 관심을 두고 지켜보자.

★★★

*2011년1월20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