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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표류기 (2009, 이해준)_정재영, 똥을 희망으로 바꾼 사나이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5. 13.
김씨표류기 - 8점
이해준

자살시도가 실패로 끝나 한강의 밤섬에 불시착한 남자. 죽는 것도 쉽지 않자 일단 섬에서 살아보기로 한다. 모래사장에 쓴 HELP가 HELLO로 바뀌고 무인도 야생의 삶도 살아볼 만하다고 느낄 무렵. 익명의 쪽지가 담긴 와인병을 발견하고 그의 삶은 알 수 없는 희망으로 설레기 시작한다.

 자신의 좁고 어두운 방이 온 지구이자 세상인 여자. 홈피 관리, 하루 만보 달리기… 그녀만의 생활리듬도 있다. 유일한 취미인 달사진 찍기에 열중하던 어느 날. 저 멀리 한강의 섬에서 낯선 모습을 발견하고 그에게 리플을 달아주기로 하는 그녀. 3년 만에 자신의 방을 벗어나 무서운 속도로 그를 향해 달려간다.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처음 들었을 때의 한줄 컨셉은 '한강에서 자살하려다 밤섬에 표류한 남자 이야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너무 우연적이긴 하지만 절대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독특한 설정에 주인공이 정재영이라... 호오, 대강 어떤 장면들이 나올지 감이 오고 여기에 연출이 <천하장사 마돈나>의 이해준 감독이라는 걸 알고 은근히 기다려지는 영화 리스트에 올렸더랬다. 성적 정체성을 고민하는 소년의 성장담을 다루었던 전작에서처럼 소수자를 바라보는 감독의 세심하고 따뜻한 시선은 이번 영화 <김씨표류기>에서도 어김없이 빛났다.

한강 한 가운데 저런 밀림이 우거져 있다니 참...새삼스럽다.



서울 사람들이 대부분 자주 지나다니는 한강에 사실 그 존재감 조차 미미한 밤섬이라는 공간에, 우리 나라에 가장 흔한 김씨 성을 가진 한 남자가 표류하게 되었다. 뚜렷한 재능도 별달리 가진 것도 없는 한심한 인생을 마감하려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그나마도 실패한 김씨는, 인간으로서 더이상 추락할 곳 없는 삶의 바닥에 다다른 순간을 맞이한 후(사루비아와 응가... 먹고 사는 일의 비루함을 가장 절절하게 보여주는 장면) 오히려 죽을 각오로 생존에 매달리기 시작한다.

정재영은 영화의 시작 후 30분 정도를 오로지 혼자서 이끌어가는 저력을 보여준다. 이후 여자 주인공인 정려원을 비롯하여 이런저런 인물들이 (아주 조금씩) 등장하지만 정재영 1인의 존재감을 당해내지 못한다. 정재영이 구사하는 슬랩스틱+화장실 코미디와 세심한 관찰력이 돋보이는 소품을 아기자기하게 이용한 설정들로 들어찬 이 영화는 문명이 발생하는 기발한 순간을 다룬 내셔널 지오그래픽 프로그램을 보는 듯한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극한 상황에 처한 한 인간이 저토록 놀라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니! 거기다 매순간마다 적절하게 던져지는 정재영의 점잖은(;) 나래이션은 재치있고 동시에 애절하다.

아, 정재영만이 소화할 수 있는

완벽한 동화적 비주얼.


말하자면 쟤가 나름대로 '윌슨'인 거다.



반면 동굴과 같은 방 안에 스스로를 고립시킨 상태로 살아가는 히키코모리, 여자 김씨 정려원의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좀 심심한 편이다. 관찰당하는 원시인으로 돌아간 남자와, 인간만 빼고 모든 필요한 것이 제공되는 환경에 있는 여자는 의미심장한 대구를 이루지만 그 비중은 사실 정재영 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어서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아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접선 시도는 (그야말로) 애틋하다. 방명록에 글을 남기고 리플을 기다리는 간단한 행위가 거대한 오프라인 상에서는 얼마나 힘들게 옮겨지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는 의외로 크다. 아주 작은 시도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 인간이 기울여야 했던 정성과 노력들이 오늘날 얼마나 간소해졌는지 새삼 느끼게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현대인이 예전에 비해 더 행복해 진 것만은 아니니 이건 어찌된 노릇일까.



웃고 즐기는 사이에도 영화는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일상 속 존재들의 소중함을 돌아보게 만든다. 밤섬도, 사회 부적응자도, 경쟁에서 낙오한 실패자 인생도 우리 주위에 언제나 있지만 그 존재를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길가에 핀 꽃 한 송이, 짜장면 한 그릇,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쓰레기 한 점, 새똥 한 줌도 모두 의미가 있는데 말이다.

희망이 올라오고 있다.



마지막에 두 사람이 마주하게 되는 장면은 다소 상투적이기도 하다. 사실 그게 상투적이라는 생각도 영화 보고 나서 한참 후에나 들었는데 왜냐면 영화 보는 동안에 계속 우느라 별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기 때문. 근데 내가 울기 시작한 지점이 어디서부터였는지 잘 모르겠다. 여자 김씨가 처음으로 낮에 방문을 열고 나와 엄마한테 말을 걸자 엄마로 특별출연한 양미경의 얼굴이 놀라움과 감격으로 뒤덮이고 그 눈에 아주 천천히 눈물이 차오르게 될 때부터였나, 아님 정재영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짜장면 시식 장면을 보여주던 순간이었나, 밤섬에서 끌려나가기 직전 김씨가 바닥에 처박힌 채 "그냥 여기 있게 해줘요. 아무 짓도 안 할게요"라고 혼자 울먹이는 장면에서였나, 기억이 잘... 안 난다.

도심의 아파트든 무인도든

혼자 있는 곳은 모두 '섬'이다.



도시 속 경쟁사회에서 도태된 현대인의 삶, 소통과 희망 뭐 이런 진부한 수사 같은 거 다 떠나서 그냥 웃기고 따뜻한 영화다. 확실한 건 정재영도, 정려원도 예쁘고 멋진 비주얼 다 포기하고 '진짜루'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한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 그래서 그냥 이 영화가 예뻐 보인다.

이렇게 시크한 도시남녀가..


S's 리뷰 별점
★★★★★ : 판타스틱!!!!!!
★★★★☆ : 이 정도면 Good~
★★★☆☆ : 본전 생각이 살짝.
★★☆☆☆ : 이거 누구 보라고 만든건가요?
★☆☆☆☆ : 이래저래 자원낭비.


영화 시작 전 무대인사 중인 정재영 아저씨랑 이해곤 감독님.
해사하고 훤칠한 정재영 아저씨가 마치 밤섬에서 바라보는 63빌딩처럼 아득하게 보인다.
닿을 수 없는 엄청난 거리감..ㅡㅜ

같이 봅시다!
카스테라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박민규 (문학동네,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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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오리배를 비롯한 동물 컨셉의 소재들이 많이 등장하는 단편소설 모음집. 웃긴데 사실 그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슬픈 거, 뭐 그런 분위기가 왠지 떠올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