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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미 (2010, 얀 사뮤엘)_'나', 잘 살고 있는 걸까?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4. 12.

디어 미 - 8점
얀 사뮤엘

Dear, 마그릿! 이 편지를 읽을 때면 넌 근사한 생일을 맞았겠지? 어른이 되어서 잊지 말라고 7살인 지금 이 편지를 써두는 거야. 여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을 적을 게. 먼저 보물을 숨겨야 해! 종이 비행기 멀리 날리기, 왕자님한테 뽀뽀도 해야 하고. 나중에 지금 묻어둔 이 보물들을 찾으면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마그릿! 넌 커서 뭐가 되었니?

 My name is 마가렛! 화려한 직업, 잘나가는 애인, 모두가 나를 부러워한다. 마리아 칼라스,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녀들처럼 되기 위해 나는 오늘도 1분 1초를 다툰다. 그런데 오늘, 날 ‘마그릿’이라 부르는 변호사가 편지 꾸러미를 전해줬다. 7살의 내가 보낸 편지라나? 아~ 유치해 죽겠네! 내 어릴 때 꿈은 딱 지금의 내가 되는 거였다. 고작 7살짜리가 뭐라고 완벽한 내 삶을 뒤 흔들어? 그런데… 우물에 묻었던 마지막 편지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1년 후', 혹은 '10년 후의 나'에게 편지보내기 같은 프로그램을 종종 본다. 하지만 내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별로 흥미를 가져본 적은 없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고, 미래의 나 역시 지금의 내가 만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나'와 '나' 사이를 잇는 다리 같은 게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오만함 때문이었던 듯.

하지만 나의 일상과 나를 둘러싼 세상은 때때로 어제의 나를 잊게 만들고 지금의 나를 흔들고 미래의 나를 보이지 않게 만든다. 오늘의 '나'는 과연 어제의 내가 꿈꾸던 '나'의 모습을 온전히 이루며 살고 있는가, 내가 잘 살아가고 있는가를 가늠하고자 할 때 가끔은 오래 전 내가 꾸었던 꿈들을 뒤적여 보는 과정이 필요한 것은 그래서이다. 이 세상에서 나에 대해 올바로 판단을 내려줄 사람은 나 밖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나'가 일곱살 때의 현명하고 총기 넘치는 때의 '나'라면 더욱 좋겠고.

어른이 된 후 총기가 흐려질 때를 대비해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마그릿'.



영화 속 '마가렛'(소피 마르소)은 남부러울 것 없는 커리어 우먼으로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은 잊고 싶은 과거를 스스로 봉인해 버린 채 현재만을 살아가고 있는 여성이다. 어린 시절 클라리넷을 불며 고래 수의사, 우주 비행사, 공주 등의 장래희망을 꿈꾸었던 그녀는 지금 원자력 발전소를 짓는 무시무시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커리어 우먼의 상징인 검정 투피스나 드레스를 훌륭하게 소화할 수 있는 몸매와 미모, 언변과 자신감 등 모든 게 완벽해 보이지만 그러한 모습이 어린 시절 그녀가 꿈꾸었던 것들은 아니다. 아마도 35년 쯤 전에 쓰여진듯 한 그녀의 편지 속에서 어린 '마그릿'은 차도녀 '마가렛'에게 '물웅덩이 뛰어넘기', '에스컬레이터에서 쿵쾅거리기', '왕자님에게 입맞추기' 등의 행동을 할 것을 주문한다. 그리고 좋아했던 남자를 다시 만나는 것. 이 모든 여정에 흠뻑 빠져들어 과거와 화해하는 작업에 들어간 마가렛이 결국 가 닿은 곳은 온전한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길이었다. 코코 샤넬이나 마가렛 대처,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을 흉내내는 도시녀자의 일시적 자기 주문으로 남들이 보기에 그럴 듯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고 진짜 내가 되는 일이 가장 어려우면서도 행복한 것임을 깨닫는 과정이었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호흡이 빠른 프랑스 코미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조금은 어리둥절할 만한 부분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얀 사뮤엘 감독의 전작 <러브 미 이프 유 데어>에서 맛보았던 귀여운 상상력과 유머에 대한 유쾌함은 역시 여전하다. 또한 이 영화의 90%는 소피 마르소가 보여주는 표정 연기, 몸 연기에 기대고 있는데 아직도 <라붐> 속 단발머리 소녀로 기억되고 있는 소피 마르소가 눈가에 주름 잡히도록 활짝 웃는 모습을 보면서 관객은 묘하게도 주인공 '마가렛'과 어린 시절의 '마그릿'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녀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다는 점이 영화 속 주인공의 캐릭터에 동화되도록 하는 데에 큰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녀의 미모와 연기력, 몸매 모든 게 완벽하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7살 때의 나는 어떤 꿈을 꾸고 있었나 갑자기 궁금해 지는 사람이 많아질 듯 하다. 집안 어느 구석엔가 남아 있을 초등학교 1학년 때의 그림일기나, 반 친구들끼리 수업 시간에 몰래 돌려 보았던 쪽지 따위가 가득 담긴 상자를 찾아내 조만간 다시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열어보고 싶다는 충동. 나도 저 때 저랬는데, 그때 그 아인 어떻게 됐을까,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앞으로 나는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까 등 진부하면서도 신선한 고민들이 갑자기 생겨나는 탓에 '아-' 하는 탄식을 쏟을 도시녀들이 꽤 많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