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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영화리뷰

제12회 전주국제영화제 감상작 <베닐드 혹은 성모>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5. 8.




 2010년 서울아트시네마 개관 8주년 기념 영화제에서 <금발 소녀의 기벽>이란 작품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영화를 만든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감독이 영화 역사상 최고령(1908년생)의 감독이었지만 사실상 내가 보았던 작품은 전혀 없었던 상태였다. 기껏 알고 간 정보가 상영시간이 63분이라는 것 정도.

 <금발 소녀의 기벽>을 보기 전, 이미 보았던 지인은 내게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일 거라고 말했었다. 그 말은 정확했다. 영화를 본지 1년여의 세월이 지났고, 그동안 나는 일반인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숫자의 영화들을 시각으로 경험했다. 그리고 그중 대부분의 영화들은 기억에 남지 못했고, 일부 영화들의 인상만이 내 머리에 남아 있다. 그러나 <금발 소녀의 기벽>의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기억한다. 이것은 단순히 기존의 진행과는 다른 마무리였기 때문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야기 전개의 흐름을 딱 끊어버린 과감한 결단과도 같았던 진행의 경험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올리베이라 감독의 영화 한 편은 내 머리에 지우기 어려운 잔상을 남겨주었다. 이후 다른 영화(우디 앨런의 근작 <환상의 그대>)를 통해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다른 하나의 잔상(주인공과 금발소녀를 사이에 둔 유리창 화면구성)을 끄집어낸 정도가 올리베이라 감독 영화에 대한 1년여의 기억들의 전부. 하지만 전주국제영화제의 상영작인 <베닐드 혹은 성모>는 올리베이라 감독에 대해 또 하나의 기억을 만들 좋은 기회였다.

 영화는 젊은 처녀 베닐드의 임신을 둘러싼 이야기다. 그녀의 임신은 누구의 짓인가를 둘러싸고 베닐드는 신의 뜻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이들은 범인이 누구인가를 찾으려 한다.

 올리베이라 감독은 ‘처녀의 임신’이란 소재를 통해 종교와 윤리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댄다. 성모의 존재에 대한 우회적 담론, 그리고 직접적으로 들이대는 성적 윤리 문제에 대한 질문. <베닐드 혹은 성모>가 1974년 작임을 상기한다면, 이 영화가 당시 얼마나 급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았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베닐드 혹은 성모>는 이런 급진적 내용보다 그것을 담은 그릇이 더 흥미롭다. 영화 시작 후 몇 분이 흐르면 관객은 <베닐드 혹은 성모>가 상당히 제한적 공간에서 진행하는 이야기임을 느끼게 된다. 바로 연극적인 무대의 차용이 <베닐드 혹은 성모>의 독특한 형식미다. 제한된 몇 개의 공간에서 7명의 등장인물만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영화의 형식은 연극적 요소에 영화적 요소를 결합한 실험으로, 화면에 나온 인물은 말없이 화면 밖에 대화를 듣기만 하는 식의 구성(그것도 상당히 긴 테이크다)은 기존의 영화에서는 보기 어려운 도전이다. 여기에 감독은 영화만이 가진 샷을 십분 활용한다. 클로즈업 등으로 포착한 인물의 표정 변화는 이야기 전개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는다. 미묘하게 변하는 얼굴 근육, 떨리는 입술, 이곳저곳을 응시하는 눈길. 영화는 연극이 가진 인물과 관객 사이에 있는 '거리'의 제한을 영화의 '샷'이란 장점으로 해체하며 관객이 직접 표정의 변화를 읽어보는 체험을 선사한다.

 어찌 보면 <베닐드 혹은 성모>는 스릴러적인 구조의 급진적인 이야기라 느낄 수도 있다. 달리 보면 연극적 무대에 대한 영화의 실험이라는 형식미에 몰입해버린 작품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감한 내용과 독특한 형식미의 결합은 지극히 영화적이었다. 관객과의 시각적 거리를 바꾸어보는 실험에, 사회와 시각적 거리를 바꾸어본 내용. 올리베이라 감독은 30여 년 전에 이미 상당한 고민과 그에 걸맞은 결과물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건 올리베이라 감독의 현재를 알 수 있었던 게 <금발 소녀의 기벽>이었다면, 그의 과거를 알 수 있었던 건(물론 지극히 일부분이란 전제가 필요하다) <베닐드 혹은 성모>였다. 이제 그의 얼마 남지 않은 미래이자 노작가의 고민의 결과물인 <앙젤리카의 이상한 사례>를 아트시네마 9주년 영화제로(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이미 상영했지만) 만날 수 있다. 어떤 고민의 결과를 보여줄지 벌써 기대된다.

★★★☆

감독 :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Manoel de Oliveira
PORTUGAL | 1974 | 106MIN | 35MM | COL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