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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없는 산 (2008, 김소영)_어른을 뉘우치게 하는 아이에 관한 이야기(스포)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9. 10.

나무없는 산
감독 김소영 (2008 / 한국)
출연 김희연, 김성희, 수아, 김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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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 있을지도 모릅니다.

엄마와 살고 있는 사랑스러운 두 자매 진과 빈. 어려워진 형편 때문에 홀로 두 아이를 키우기가 힘들어진 엄마는 진과 빈을 지방에 사는 고모에게 맡기고 아빠를 찾으러 간다. 하지만 고모는 신세한탄을 하며 술만 마실 뿐, 두 자매에게 무관심하기만 하다. 엄마가 떠나던 날, 진과 빈은 돼지 저금통이 꽉 차면 돌아온다는 엄마의 약속에 메뚜기를 구워 팔고 큰 동전을 작은 동전으로 바꿔가며 조금씩 저금통을 채워나간다. 저금통이 꽉 차던 날 약속과 달리 엄마는 돌아오지 않고 얼마 뒤 두 자매는 다시 시골 할머니에게 맡겨지게 되는데… 모두에게 짐만 되는 진과 빈, 이 작은 소녀들이 머물 곳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영화를 영화로 보아 넘기기는 다소 힘들다. 음악과 내래이션 없는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하는 느린 호흡 속에서 꾸미지 않은 아이들의 날 연기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거칠지만 그래서 그만큼 진솔하고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영화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엄마 곁을 떠나 친척집에 맡겨지게 된 어린 자매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보여준다. 카메라는 어린 자매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오랫동안 비추고 무표정한 듯 하지만 불안함에 흔들리는 꼬마들의 눈빛을 보여준다. 그 중 역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자매의 메뚜기 장사를 묘사한 장면이었는데 쫓기듯 내려가 살게 된 고모댁에서 동네의 또래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간 시간 진과 빈은 들을 누비며 메뚜기를 잡으러 다닌다. 혹 밥을 잘 챙겨주지 않는 고모 때문에 배가 고파서 그런가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지만 진의 생활력은 나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메뚜기 구이를 찾는 '오빠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성을 발견한 것!! 오빠들을 대상으로 한동안 메뚜기가 잘 팔려 돼지 저금통에 신나게 동전을 넣을 수 있었지만 역시 아이는 아이인가. 시커멓게 탄 메뚜기를 모른척하고 팔았다가 고객에게 외면을 당하게 되는 것. 상도를 무시하면 안 되지... 아이들 세계에서도 신뢰를 바탕으로 한 비즈니스 의식이 작용한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게다가 더 웃긴 건 메뚜기 구이를 자주 구입했던 아이가 진이의 메뚜기를 거부하다가 인심쓰듯이 메뚜기 봉투 여러 개를 백원에 '퉁치는' 장면이었다.;;; 음... 극적이어서 재밌긴 했지만 어린 아이들이 정말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어 부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역시 절박한 자매의 심경을 보여주기엔 더없는 설정이었다.

영화를 볼수록 가슴이 답답해 졌다. 아무 잘못도 없이 어른들의 눈치를 보고 기약없는 날을 기다리며 동생까지 돌보아야 하는 진의 마음 속에서 아이다운 희망이 자라날 수 있을까. 정류장이 내려다보이는 돌무더기산 꼭대기에 비쩍 마른 나무를 심고서 동생과 함께 오매불망 엄마를 기다리는 진의 오늘과 내일이 그렇게 죽어버린 나무처럼 멈추어 버리는 건 아닌지. 언제나 가장 화가 나는 건 어린 아이가 닥친 불행의 책임은 거의 100% 어른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친정에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받은 고모는 진이 엄마의 친정에 가서 친정 아버지와 목소리를 높여 싸운다. 서로 아이를 맡아 기를 수 없다는 것이다. '키울 능력이 없으면 낳지를 말아야지'라고 엄하게 고모 앞에서 역정을 내는 할아버지 목소리를 듣는 진이의 표정에서는 체념이 읽히고 만다.





이 영화의 모든 주요인물이 여성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진이와 빈이 자매는 아빠로부터 버림받은 엄마와 살고 있다. 엄마는 홀로 살림을 이끌며 자매를 키우다 결국 고모에게 아이들을 맡긴다. 그 고모도 가족없이 혼자 살며 술 마시는 걸 낙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다못해 동네에서 유일하게 진&빈 자매와 놀아주던 다운증후군 아이도 엄마만 등장하고 빈의 이마에 상처를 낸 민호도 엄마만 나온다. 아이들의 양육을 거부하는 건 외할아버지이지만 결국 그 아이들을 품어주는 건 외할머니의 역할이다. 평생에 걸친 노동을 인해 주름진 얼굴과 손등으로 계속해서 불을 때고 밀가루 반죽을 하고 치자를 펴 말리고 할아버지 점심을 나르고 자매에게 이것저것 먹이려고 하는 할머니의 모습에 진이는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할머니의 구멍난 털신을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이는 그때까지 애지중지 하던 돼지저금통을 할머니께 드리며 활짝 웃는다. 관객은 아이의 웃음을 그때서야 볼 수 있게 된다.


얼핏 보면 이 영화는 자칫 지루해 보이기 쉽다. 자매의 얼굴에서 도통 떠나지 않는 카메라와 해가 구름 사이에 가려졌다 다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고정된 채 하늘을 보여주고 있는 장면들이 특히 그렇다. 하지만 이 장면은 유일하게 영화에 여백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진이의 심경에 변화가 생길 것이라는 것,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자매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꼼꼼하게 계산된 연출력이 돋보이는 순간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힘차게 노래를 부르며 들길을 걸어가는 자매의 모습은 그들의 앞날이 어둡지만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미소를 짓게 만든다.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극도 아닌 이야기. 낮에는 할머니의 리어카를 밀거나 동생의 때에 찌든 옷을 빨고 밤에는 동생에게 덧셈을 가르치는 진이의 어른스러운 모습에 감동하게 되는 것.

영화는 현실과 아주 가까이 있으면서도 인위적으로 배제되어 있는 것들이 많이 보인다. 앞서 언급한 남성의 존재가 그렇고, 미디어 수단이 도통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렇다. (핸드폰이 아주 잠깐씩 등장하지만 이때의 핸드폰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빛과 표정만큼은 가장 현실적이며 그 안에 가장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그런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어른들이 똑바로 살아야 한다는 메세지를 전해주는, 이 영화는 그래서 어른들을 위한 다큐멘터리와 동화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