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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영화리뷰

제4회 시네마디지털서울 영화제 감상작 <짐승의 끝>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8. 27.


짐승의 끝 End of Animal
South Korea | 2010 | 114min | color | 16:9 Anamorphic | Stereo | HD
World Premiere


 불현듯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또는 김윤아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을 인용하고 싶다. <짐승의 끝>은 '불안'이라는 단어 말고는 설명하기도 힘들다. 스크린을 감싸 돌며 관객에게 전해지는 불안의 기운과 잠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기에, 제목을 조금 변형하여 <불안은 영화를 잠식한다>로 붙여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짐승의 끝>은 몇 편의 뮤직 비디오와 애니메이션, 단편 영화 등을 만든 조성희 감독의 첫 장편 영화다. <짐승의 끝>을 더 흥미롭게 보고 싶거나 조성희라는 이름에 친숙함을 느낀다면 그 교점은 아마도 <남매의 집>이라 생각한다. 나는 <남매의 집>과 <짐승의 끝>을 단순히 전작과 근작이라는 시간으로 나누는 것을 거부하며, 영화의 질감에서 느낀 불안에 착안하여 불안의 연작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남매의 집>은 공간 속의 기운으로 충만하다. 갇힌 공간 속에서 감독이 뽑아내었던 불안하고 어두웠던 기운. 기운은 어떤 설명도, 내용도 없는, 자칫 빈 껍데기로 치부될 만한 영화를 기억하게 만들어주었던 힘이다. 스크린을 응시한 관객을 불안함의 기운으로 잠식되게 만들었던 <남매의 집>에 대한 나의 기억 내지 당신의 기억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불안의 연작이라 말했던 것처럼, <짐승의 끝>은 <남매의 집>의 공간적인 확장판에 가깝다. 집이라는 공간은 마을로 확장이 되고 등장하는 인물의 숫자는 늘어나는 등 규모는 늘어났지만, 전작의 요소들은 여전히 숨쉬고 있다. 여전히 폐쇄된 개념의 공간, 추상적인 인물들의 행동. 또한 사건을 다루는 방식 역시 전작의 손길 그대로다. 관객을 사건으로 끌어들이지만, 일체의 논리적 설명은 거부한 채, 사건 자체의 이미지를 보고 이미지가 가진 기운을 관객에게 느끼게 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택시를 타고 가던 순영(이민지)과 우연히 합승한 야구모자(박해일)의 만남. 그리고 야구모자의 알 수 없는 말과 행동. 이어지는 자동차 사고. 정신을 잃었던 순영이 깨어난 곳은 전기도 끊기고 인적도 드문 공간이다. 낯선 인물들이 있는 낯선 공간.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존재인 야구모자는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별하기 힘든 낯선 공간에서 유일하게 모든 것을 알고, 지켜보고, 간섭하는 존재다. 초현실적 존재인 '신'에 가까운 존재다.

 그는 왜 순영을 이 공간으로 데리고 왔을까? 감독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적 요소들을 적당히 차용한 방법으로 풀어낸다. 성경의 한 구절에서 인용한 듯한 순영의 임신. 순영은 공간 속에서 여러 시험을 마주하게 된다. 여러 부류로 발현한 욕망. 성욕과 식욕, 폭력과 거짓 같은 욕망들은 인간의 모습 또는 짐승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순영과 마주한다. 공간 속에서 순영은 '그'와 '그녀'들이란 짐승들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이 몸부림은 생명이 탄생하기까지의 아픔으로 읽어볼 수도 있으며, 종교적인 시험의 과정으로 읽을 수도 있다. 물론 정해진 해석을 원하는 방식이 아니기에 딱 이렇다는 결론으로 읽기는 곤란하다.

 플롯에 의존하는 영회가 아닌 영화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면은 어떤 이미지를 만들고, 어떻게 기운을 만들었는가다. 공간을 다루는 조성희 감독의 감각은 본능에 가깝다. 시간을 죽이고, 공간을 비틀어낸 후 허구적 관찰을 통해 기운을 뽑아내는 힘은 가히 놀라운 수준. 나는 <이끼>에서 느끼지 못한 에너지를 <짐승의 끝>에서 느꼈다고 고백한다. <이끼>가 수렴했어야 할 장르적 힘이 바로 <짐승의 끝>이 가졌던 힘이었기에 말이다.

 다만 조성희가 만든 공간의 힘은 장편의 영화를 전체적으로 아우르기엔 뒷심이 딸림이 역력했다. 이야기가 없는 상태에서, 추상적인 것들 속에서 뽑아낸 힘에만 의존하는 것은 장편에서는 버거운 모습.

 한국 영화의 미래를 보기 위한 분들이라면 <짐승의 끝>은 필히 보아야 할 작품이다. <짐승의 끝>은 한국 영화의 미래를 읽어볼 훌륭한 바로미터로 부족함이 없다. 개인적으로 감독에게 바라는 점은 스스로 각본을 쓰는 것이 아닌, 좋은 각본가를 만나 공동작업을 했으면 한다. 이야기가 있는 좋은 각본을 만난다면 조성희 감독은 지금 보여준 것보다 몇 배 더 기량을 발휘할 사람이라는 믿음이 들기에. 멀지 않은 미래에 조성희 감독이 놀라운 영화적 성과물을 보여줄 거라 난 믿는다. 그 발걸음은 이미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