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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도 걸어도 (2008, 고레에다 히로카즈)_가족의 시간은 이렇게 흐른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6. 24.
걸어도 걸어도 - 8점
고레에다 히로카즈

요코야마 가의 둘째 아들 료타가 이제 막 재혼한 아내와 그녀의 아들을 데리고 부모님의 집을 방문한 그날.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 요코야마의 대가족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 느슨한 수다를 시작한다. 서로의 안위를 묻는 일상적인 대화 사이에 서서히 스며드는 긴장감. 12년전 이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여섯번째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료타 가족이 부모님 집에서 보낸 1박 2일을 담아낸 영화다. 고레에다는 여기서 오즈 야스지로에 비견될 만한 가족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명확히 오즈의 전통 위에서 시작된 이 영화는 낮은 앵글, 잦은 밥상 시퀀스, 꽃병과 빨래 등의 오즈식 인서트뿐만 아니라 양육, 결혼, 죽음 등 삶의 의례를 통해 ‘삶은 실망스러운 것’이라는 오즈식 잠언도 따른다. 거기에 현대 일본 감독의 신랄한 시선이 더해졌다. 어쩌면 이 영화는 오즈식 가정이 붕괴된 풍경 위에 세워진 건물인지도 모르겠다. 어린 자식은 죽고, 이혼과 죽음으로 가정은 깨지고, 가업은 이어지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은 더 이상 대화하지 않기로 작정하는... 그렇게 드러난 현대 가족의 형상이 눈을 찌른다.

여기 한 가족이 모였다. 15년 전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다 대신 죽게 된 장남의 기일을 맞이하여 모여든 식구들은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과 동시에 묘한 불편함을 동반하고 있다. 서로에게 말을 안 하고 쌓아두었던 옛 일들, 은근히 드러나는 서운한 감정들을 숨긴 채 가족 모임 특유의 시끌벅적함을 유지해 나가다가도 누군가의 한 마디로 인해 분위기는 일순간 경직되고 만다.

아들들이 의사 가업을 잇길 바랐던 아버지는 토라져서 말이 없어진지 오래고, 유쾌한듯 보이지만 어머니는 어느 순간 큰아들을 잊지 못하는 속내를 드러내고, 하는 일도 잘 풀리지 않고 부모에게도 면목없는 작은 아들 료타는 눈치보이는 자리가 불편하고, 료타와 재혼한 그의 부인은 자신과 자신의 아들에게 격식을 차리는 시어머니가 서운하다. 그나마 눈치없는 사위를 데리고 온 딸이 분위기를 풀어가지만 이미 부모님과 생활습관이 크게 달라져 있는 상태다.

한자리에 모여서 밥을 먹고 있지만 현대의 가족이란 한없이 정이 솟아나고 서로 아끼는 집단이 되기 힘들어 보인다. 각자의 생각과 호불호가 있고 사고방식이 있으며 기억하거나 잊어버리는 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늙은 어머니의 푸념처럼 사람은 말만 요란하고 작은 아들의 깨달음처럼 자식들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는데 언제나 한발짝씩 늦어버리고 만다. 또 시간은 인간을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변화시키기도 한다. 어느 순간 마음 속에 굳어져 버린 앙금들이 저절로 해소되기 전에 아마도 인간은 죽음과 먼저 만나게 될 것이다.



오랜만에 모인 한 가족의 24시간을 들여다 보는 동안 그 안에서 나와 나의 가족, 나의 부모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불편하거나 서운한 감정보다는 무뚝뚝한 아빠와 나, 그리고 애교있는 엄마와 동생이 연출하는 한 순간이 무척 닮아있는 것만 같은. 하지만 정말 그렇게 될까봐 두려운 것은 말만 요란한 자식이 되어버릴까 하는 것이다. 어머니를 차에 태워드리거나 아버지와 축구장에 가거나 하는 정말 어렵지 않은 약속들이 허망하게 남겨져 버리도록, 나 사는 것 바쁘다는 이유로 그동안 당연스레 받아왔던 것들을 갚지도 못한 채 시간을 보내버릴까봐 걱정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효성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부부 간, 부모 자식 간, 형제 간의 미묘한 갈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관계 안에는 전통적인 가족 관계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들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건 자식이 부모 마음대로 커주지 않는다는 것,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변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소소한 대화와 에피소드를 통해 이러한 가족상을 보여주고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전작 <아무도 모른다>에서처럼 무심하면서도 세심한 관찰로 인물들을 비춘다. <아무도 모른다>의 부모없는(?) 아이들은 사회와의 접점을 잃고 경계에서 헤맸지만 <걸어도 걸어도>의 부모'있는' 어른들은 머리가 큰 이후로의 자기 모습만 기억하고 부모의 모습이 슬퍼보일까봐 겁내고 먼저 멀어져 버린다. 하지만 부모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선물도 아니고 내가 원할 때까지 불멸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닌 것을.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도 서로 올바른 역할만을 수행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지만 그런 기본 집단에서조차 나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함께 하는 것으로부터 피하게 된다면 인간은 결국 홀로 남겨지고 말 것이다. 얼마 전에 보았던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처럼 인생이란 결국은 외롭게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지만 그래도 내가 염려할 대상이 있다는 것, 나를 염려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 하는 과정 자체는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나중'이 아닌 '바로 지금'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만이 훗날의 후회를 막아 줄 것이다.


S's 리뷰 별점
★★★★★ : 판타스틱!!!!!!
★★★★☆ : 이 정도면 Good~
★★★★☆ :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할. 
★★★☆☆ : 본전 생각이 살짝.
★★☆☆☆ : 이거 누구 보라고 만든건가요?
★☆☆☆☆ : 이래저래 자원낭비.


한 마디로 : 아.. 부모님한테 잘 하자. 그리고 때로 '뒷담화'는 소속감을 다지는데 유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