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에 만들어진 <트론>은 최초로 CG를 사용한 장편 영화라는 기념비적 측면 때문에 영화 기술 발전의 연표에서 중요한 위치로 언급되곤 한다. 시선을 조금 돌려 CG가 아닌 이야기를 상기해보자. 대부분의 가정집으로 컴퓨터가 보급되기 이전에 컴퓨터 전문 용어를 사용한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점. 네트워크, 아바타, 커뮤니티적인 면까지 영화 이야기에 도입한 사실은 시대를 너무 앞서갔던, 차라리 시대를 이끌었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를 정도의 놀라운 발상이었다. 도입에는 성공했지만 너무 앞서간 탓에 안착에는 실패했던지 속편은 엄두도 못 내던 <트론>(※흥행 성적은 제작비 1700만 달러에 수입은 3300만 달러로 1982년 북미흥행순위 22위를 기록했다. 본전 정도를 회수했던 성적). 28년이 지난 2010년, 3D라는 산업적인 발판에 힘입어 다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귀환이라는 사실에 스스로 흥분했던 걸까? 21세기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트론:새로운 시작>은 이야기와 볼거리, 두 가지 모두를 놓친 작품이다. <트론:새로운 시작>은 <트론>의 이야기 골격을 거의 그대로 가져다 사용했다. 속편이니 이것은 당연할 지도 모른다. 여기서 간과하면 안 되는 사실이 있다. 1982년부터 현재 2010년까지는 28년이란 세월의 간극만이 있는 게 아니다. 비약적으로 발달한 컴퓨터 산업이 우리 일상과 지식 속으로 들어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트론:새로운 시작>은 이걸 놓쳤다. 1982년에는 때 이른 도입의 이야기였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이걸 다시 보여주는 건 뒤늦은 언급이다. 28년의 세월동안 무수히 등장한 SF영화들의 성공과 실패의 모습 속에서 시대의 흐름을 읽어야 했고, 철학적인 완성도까지 갖추었던 <매트릭스>의 깊이를 기억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도 흥미롭게 접근할 여지가 있는 <트론>은 2010년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트론:새로운 시작>으로 변신하면서 이야기는 훼손되고(그것도 바보스럽게) 말았다.
볼거리라는 측면에서도 <트론:새로운 시작>은 새롭지 않다. 빛을 이용한 CG를 강조하지만 현란함은 처음 보는 순간에만 신기하지 영화의 전체 시간을 이끌 힘이 아니다. 기본적인 이야기가 붕괴된 상태에서 어두운 공간 속 형광등이 반짝거리는 걸 보는 행위는 나이트클럽에서 사이키 조명을 보는 듯한 말초적인 자극 외의 의미는 없다. 더욱이 빛의 CG를 사용하는 레이싱 장면이나 게임 장면은 이미 <트론>에서 나왔던 설정을 컨버팅(?)한 정도다.
<트론:새로운 시작>은 빛을 이용한 CG 효과에만 집착하는, SF영화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설정도 망각한 난파지경에 간 영화다. 디지털 세상에서의 창조와 진화의 인문학적인 고찰은 욕심이라 쳐도 기본적인 상상에서의 실망스러움은 상당하다. 28년이 지난 시점에서 속편이 보여주어야 할 목적성에 대한 고민을 찾기 힘들다. 만든 이들이 시대를 반영한 새로운 이야기가 아닌 1982년에 했던 이야기를 살짝 포장해서 다시 내놓은 마당에 보는 이가 무엇을 찾고 읽는다는 행위는 무의미하다. 설정의 문제라든가, 영화 스토리의 문제들을 하나씩 복기하는 행위가 소모적이란 생각마저 든다.
도리어 흥미로운 점은 컴퓨터를 잘 모르던 시절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디지털 이야기를 어렵게 늘어놓았던 <트론>이 이번 속편 <트론:새로운 시작>에선 사람들이 잘 아는 디지털 이야기를 마치 새롭다는 듯 늘어놓는 사실이다. 그 중간에는 <매트릭스>가 있다. 28년의 세월을 둔 <트론>과 <트론:새로운 시작>, <매트릭스>. 이 영화들의 등장 시점들을 보면서 시대의 흐름을 읽어보는 점이 도리어 재미있다. 이것이 <트론:새로운 시작>의 영화적인 재미와 완성도와 아무 상관없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이니 재미있으면 그만이다는 식의 잣대를 <트론:새로운 시작>에는 들이밀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각 영화가 받아야 할 평가는 무조건적인 재미가 절대적 평가 기준이 아니다. 영화마다 가치와 의미가 다르고, 그에 따른 평가도 다르다. <트론:새로운 시작>은 <트론>의 연장선에서 보아야할 영화이며 평가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보다 더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 것은 디즈니 로고였다. 이토록 어둡고 암울하게 표현된 디즈니 로고는 처음이다.
★★
*2010년12월30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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