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공간의 통제
납치는 과거부터 빈번히 이루어진 범죄다. 단순한 돈의 갈취부터 정치적 목적 달성까지 목적도 다양했으며, 납치 방식도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사회적 사건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영화에서도 인질극은 자주 다루어지는 소재다. 일단 인질극은 사건 배경으로 정치-사회적 사건을 넣기 쉽다(물론 실제 일어난 일을 다루는 경우도 다반사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해결과정에 가족과 국가 등 휴머니즘을 강조하기도 쉽다. 그러나 단점도 있다.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이 일정 시점부터는 한정이 되다 보니 전개가 단조롭기 쉬우며, 일정하게 공식화된 플롯의 재탕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인질극을 조금 더 다른 방식으로 다루려는 영화들은 다양한 시도를 한다. 공간 설정에 신선함을 넣어 제한 범위를 확장시키거나(움직이는 물체인 기차나 버스 등을 사용하는 식), 편집과 전개에서 속도를 붙여 주기도 하고, 물량을 앞세운 볼거리를 늘리는 등 장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그러나 <베리드>는 차별화의 범주로 보기에는 그 보폭이 너무나 멀리 가버린 영화다. 보통의 인질극을 다룬 작품들의 진화 방향과는 거리가 먼, 인질극의 공포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 아닌 제한된 공간 내에서 청각적으로 보여주겠다는 시도를 한다. 관객 스스로 상황을 상상하게 만들겠다는 역발상의 접근. 바꿔말하면 완벽하게 통제된 공간 안에서만 이야기를 풀어간다.
<베리드>의 무대는 사람 하나 간신히 누워 있을만한, 몸도 제대로 움직이기 어려운 관 속이다. 물론 이전에도 폐소공간 안에서 사건을 다룬 영화들은 있었다. 하지만 이전의 영화들은 장면 전환 등을 통해 다른 공간을 함께 다루었다. 그에 반해 <베리드>는 어떠한 공간적 이동을 허용하지 않는다. 회상 장면도 없다. 주인공이 혼자 체험하는 현재적 시점으로 시간이 흐르며, 모든 상황은 관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영화적 공간의 완벽한 통제는 <베리드>의 중요한 영화적 성취다.
공간의 통제는 영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다양한 장면의 전환도 불허한 상태에서 작은 공간 안에서만 진행한다는 것은 영화로서 불가능에 가까운 모험이다. 게다가 <베리드>는 배우 한 명만이 등장하는 작은 공간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비슷한 성취로 거론하고 싶은 영화는 이란 영화 <쉬린>. <쉬린>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모습만을 92분간 보여줌으로써 영화 속 관객들의 눈빛과 그들이 듣는 소리를 통해 우리가 상상하게 만들었다. 동일해 보이는 프레임(사실상 구도는 동일함에 가깝다)에 인물만 바꾸는 방식. <쉬린>은 '프레임의 통제'를 이루었다면 <베리드>는 공간 속 주인공을 보여주는 구도를 바뀌지만 공간 자체는 그대로인 '공간의 통제'를 했다. 동일한 공간 안에서 주인공과 대화를 하는 인물들의 표정과 사건 상황을 상상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영화의 감정을 만들어 냈다.
폴 콜로이의 모습으로 들여다 본 미국의 모습
통제된 공간 속에서 영화가 제기한 문제는 '은폐'와 '조작'이다. <베리드>의 주인공 폴 콜로이(라이언 레이놀즈)는 이라크에서 근무하는 미국인 트럭 운전사였는데, 갑작스런 습격 후 깨어나 보니 관 속에 갇혀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영화는 한 남자의 평범한 납치 사건 정도에 머물 것 같았던 이야기를 이라크전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맞물리게 하면서 사회적 시점으로 사건을 확장시킨다. 폴 콜로이는 국방부, 회사 등에 자신을 어떻게 꺼내줄 것인가를 간절하게 묻는다. 하지만 정부와 회사는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에 관심을 둔다. 수습 과정에서 폴 콜로이의 생존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방송 등 언론에 보도가 안 되도록 조용히 처리하는 것, 국제 문제 등 뒤탈이 없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관 속에 묻힌 사람을 구하기는커녕 책임 회피를 일삼는 과정을 통해 미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다루는 <베리드>는 작게는 개인의 허탈감에 대한 이야기며, 크게는 국가의 부조리함을 다룬 이야기다. 개인적 허탈을 다룸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대목은 자신이 위대한 야구선수였거나 양복 차림의 회사원이었다면 구조되었을 것이라는 폴 콜로이의 대사다. 유명했거나, 경제적으로 부유했다면 보호받았을 테지만 트럭을 모는 노동자였기에 버림받는다는 자조 섞인 탄식. 그냥 내뱉는 대사지만 쉽게 넘길 수 없는 슬픔이 묻어난 대사다.
국가의 부조리함을 다룸에서는 매뉴얼의 의한 시스템 운영을 자랑하는 미국이지만 매뉴얼에 없는 예측 불가의 상황에서 누구의 관할인가를 따지는데 급급한 어리석음을 노골적으로 조롱한다. 조롱 이후에 드리우는 분노와 절망은 미국 시민들이 이라크 전 이후 느끼는 감정과 겹쳐있다. 세계 최강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자신의 나라가 비논리적 관료주의로 점철 되어있고, 잘못된 의사결정을 통해 전쟁을 했다는 후회와 분노 그리고 절망. 영화에서 폴 콜로이가 마지막까지 가졌던 최소한의 희망마저도 거짓 정보임을 알았을 때의 허탈감은 도대체 진실이 존재하기는 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다.
어쩌면 <베리드>에서 생매장된 폴 콜로이는 미국 정부가 그냥 묻어버리고 싶었던, 또는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절망의 모습, 단 한순간도 외부의 모습을 보지 못한 주인공의 모습은 폐소 공간 속에에서진실의 공기가 점점 사라지는, 질식할 것만 같은 공포감 속의 미국처럼 보인다. 절망이 끝나지 않은, 아직도 진행 상태임을 암시하는 듯한 마지막의 긴 여운. 미국은 아직도 생매장된 상태다. 단지 마지막이 희망일지, 절망일지를 아직 모를 뿐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우리 역시 일제 강점기의 잔재에서 벗어나질 못 한 모습 아닌가. 우리가 외면하는 진실의 모습이 생매장된 채 우리의 관심을 기다릴 지도 모른다.
*<베리드>는 1개의 세트, 7개의 관을 통해 모든 컷들이 다른 느낌을 주도록 노력했다고 한다. <베리드>에서 보여준 세트 구성과 카메라워킹은 영화 연출, 촬영, 미술, 조명 등 영화적 문법의 다방면에서 아주 좋은 교재이자 연구 과제라고 생각한다. 또 라이온 레이놀즈가 보여준 연기도 훌륭한 연기 교재다. 한 번에 가는 듯한 느낌으로 연기를 한 모습인데, 일관성을 보여주기 위해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가히 올해 본 영화 중 최고 수준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
*2010년12월2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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