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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머워즈 (2009, 호소다 마모루)_어떻게 보면 위험한 애니 (스포작렬)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8. 24.
'OZ’의 보안 관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천재수학 소년 ‘겐지’는 짝사랑하던 선배 ‘나츠키’의 부탁으로 시골 여행에 동참하게 된다. ‘나츠키’의 대가족과 함께 시골 마을에서의 즐거운 추억도 잠시, ‘겐지’에게 날라온 한 통의 문자메시지는 사이버 가상 세계 ‘OZ’를 사상 최악의 위기에 빠뜨린다. ‘OZ’의 붕괴는 현실 세계의 위기로 이어지고, ‘겐지’는 이 모든 사건의 주범으로 몰리게 된다. ‘겐지’와 ‘나츠키’의 대가족은 인류의 운명을 건 일생일대의 여름 전쟁에 나선다!

스포일러 엄청납니다.

영화는 초반에서 'OZ'라는 가상세계를 상세히 묘사하는 데에 꽤 긴 시간을 할애한다. 그리고 등장하는 과학반 동아리의 소년들과 퀸카 선배의 모습, 그리고 여름방학이라는 시간적 배경은 전형적인 일본의 향토 애니메이션의 분위기를 답습한다. 이들에게는 분명 신나고 엄청나고 감동적인 모험이 펼쳐질 게 분명하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 지점이다.

그저 순수한 마음에 나츠키 선배를 따라 나츠키의 할머니 90세 생일 잔치에 남자친구 행세를 하러 가게 된 겐지와 그들 사이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려고 하는 풋풋한 감정들, 그들 곁에서 바람을 잡는 어른들... 이것 역시 <추억은 방울방울> 등 많은 지브리 영화들에서 보아온 장면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관객의 허를 찌르는 부분은 엉뚱한 문자 하나로 인해 전 세계의 어카운트를 장악할 수 있는 암호를 해킹 실험용 A.I.가 온 행정 시설을 마비시키게 된다는 설정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주인공 소년 겐지는 그 대궐같은 집 한 구석에서 사이버 세계의 최고 파이터 킹 카즈마를 만나게 된다.

이때 나츠키의 첫사랑이었던 와비스케 삼촌이 돌아오고 이 삼촌이 해킹 A.I.의 개발자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할머니는 문제를 일으켰다면 스스로 해결하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죽는다. 이제 가족들에게 남겨진 것은 모두 힘을 합쳐 '러브머신'을 무찌르고 평화를 되찾아 할머니의 유언을 수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할머니께서 보통 분이 아니셨다는 점이다. 엄청난 인맥을 자랑하는 할머니는 사회가 일대 혼란에 빠지자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어 '당신의 힘이 필요하다' '우린 할 수 있다'라고 자신감을 북돋워 모두의 에너지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전화를 통한 유선상의 합심은 OZ가 강조하는 사이버세계 안에서의 '커뮤니케이션'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듯 하다. (실제로 OZ와 할머니는 모두 'communication'이라는 단어를 강조한다.) 그것이 맞벌이 부모 아래에서 외롭게 자란 겐지를 크게 변화시키는 힘이 되었다. 시끌벅적하고 북적대지만 꼭 다함께 모여서 밥을 먹는 대식구의 분위기, 정감. 그 모든 것이 핵가족의 일원이었던 겐지에게 놀라움과 감동의 대상이었던 거다.



영화는 처음부터 가상과 현실을 정신없이 오간다. 이 영화의 가장 백미는 OZ라는 사이버 세계에서 벌어지는 전세계 어카운트들의 일상에서 전투에 이르기까지에 대한 그럴듯한 묘사다. 3명 중 2명은 갖고 있을 아바타 몇 억 명이 현실과 유사하게 꾸려나가는 제 2의 세상, 실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권력 행사가 가능한 공간. 그 안에서 테러가 일어난다는 설정 충분히 현실에서도 있을 법 하다. 우리는 이미 컴퓨터 해킹을 이용한 도시의 마비 상태를 <다이하드 4.0>과 같은 영화를 통해 진즉에 목격한 적이 있다. 그리고 사이버 대테러의 주체가 인간이 아닌 기계라는 설정 역시 의미심장하다. 인간은 원래 가끔 스스로 만든 버그에 의해 공격당하지 않던가.

'러브머신'은 몇 억 개에 해당하는 어카운트를 흡수하고 스스로 자란다. 러브머신의 가장 큰 무기는 바로 '알고 싶은 마음' 즉, 호기심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죄악을 일으키는 인간의 고질병이었다. 알고 싶고 침투하고 싶은 욕구는 범죄를 일으키고 그것이 사이버 세상에서 활개를 칠 때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렇게 힘을 얻은 디지털 앞에서 아날로그(실제계)는 무력하다. 온 사회가 대혼란에 빠지고 할머니는 그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가 산으로 가기 시작한 건 이 때부터다. 여름방학을 맞은 손주 녀석들을 맞아주는 기모노 입은 할머니... 이것이 일본인이 가지고 있는 '방학'과 '시골' 혹은 '전통'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이미지 코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전통과 역사의 상징이던 할머니가 디지털 테러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녀의 유언은 바로 (요약하자면) '가족이 다함께 모여 밥을 먹는 것'이다. 오늘날 가족이 해체되고 인간의 면대면 커뮤니케이션이 사라져 가는 사회에서 우리가 잃어버리기 쉬운 가치임에 분명하다. 할머니는 그 가치를 깨우칠 것을 당부하고 떠나갔다. 할머니의 죽음 때문에 슬픔에 빠져있던 가족들은 유언장을 읽고 나서 일단 밥부터 먹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같이 합심하여 싸움에 나선다.



여기서부터 슬슬 영화 전체를 감싸고 있는 일본색의 기운이 강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사실 이 집안이 분명 보통 집안은 아니다. 할머니가 이끌어 온 시노하라 집안은 메이지 유신 때부터 크게 흥했던 유서깊은 가문이다. 명주공장(이었던가. 기억이 잘...)으로 사업을 일으켰으며 전투에는 일당백으로 싸워 승리를 거둔 업적을 세운 집안이기도 하다. 이 집안을 이끌어온 '여걸'인 할머니는 90년 평생을 사시면서 특별한 인맥들을 많이 쌓아오셨다. 할머니의 전화번호부, 사진첩 안에는 119 구급대원으로 일하는 아들들부터 장관에 이르기까지 전국구 주요 관직이 다 들어있다. 이렇게 훌륭한 할머니는 많은 아들들과 며느리들을 두었다. 또한 남편의 바람기로 얻은 아들(와비스케)까지 거두어들인 관대한, 대가족의 어머니였다.(영화 속 대사처럼 첩의 자식을 거두는 일은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 또 하나 특징은 아들들은 모두 직업이 있지만 며느리들은 하나같이 가정주부라는 점이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거나 고교야구대회에 나간 아들을 응원하거나 요리하는 게 며느리들의 주임무이다. 할머니의 복수를 한다며 남자들이 각종 장비를 다 끌어와 사투를 벌일 때에도 여자들은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거나 '만두' 걱정을 한다.

어쨌거나 결국은 다들 컴퓨터와 노트북, 닌텐도, 핸드폰 따위를 들고서 다함께 전투에 나섰다. 가족의 수는 20명, 맞서 싸워야 하는 러브머신이 흡수한 어카운트의 수는 수억 명이다. 그야말로 일당백, 그 옛날 1600년대에 시즈하라의 선조들이 벌였던 전투가 가상세계에서 재현된 셈이다. 킹 카즈마와 러브머신의 대결은 '스트리트 파이트'식이었다. 여기서 카즈마가 패하자 대신 나선 나츠키는 집안 식구들끼리 쳤던 전통 게임인 '고스톱'으로 대결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판돈으로 자기 가족들의 어카운트를 모두 건다. 이때부터 나츠키와 러브 머신이 벌이는 대결은 엄청나게 스케일 있어 보이면서도 아동만화를 연상케 한다. OZ의 관리자가 나츠키에게 선물한 '특별아이템'으로 나츠키는 갑자기 '세일러문 변신'을 일으킨다. 아아.. 그 장면에서 설마설마 하고 있었는데 일본 망가의 공주 변신 장면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었다. (이 애니메이션은 철저하게 자국 국민을 위한 영화였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나츠키의 아바타는 고양이 귀까지 달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에 걸쳐 변신을 마친 나츠키는 황금 기모노에 날개를 단, 여신의 모습이었다. 그러고 고스톱을 친다. 한 순간의 실수로 어카운트를 모두 날려서 판돈이 부족해 졌을 때 이름모를 독일 소년이 자신의 어카운트를 써달라고 제안한다. 곧바로 뒤를 이어 자원해 오는 전세계 수억의 어카운트들. 이때 가슴이 뭉클했어야 하나. 전지구 사람들이 각자 핸드폰을 들여다 보며 '고!'를 외치는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여기까지는 그냥 재미 요소로 볼 수 있었다.

나츠키가 고스톱으로 러브 머신을 무너뜨리고 있는 동안 일본의 인공위성이 추락하기 시작한다. 목표는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의 대궐과 같은 그 전통 가옥이다. 이때 식구들과 더불어 일본의 뉴스 아나운서가 읊는 대사들은 미국 국방성도 해킹실험용 장치가 이렇게 큰 화를 불러오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미국은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등이다. 또 온 가족이 목숨을 걸고 OZ 안에서 벌이는 전투가 러브머신에게는 그저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대사도 오버랩된다. 결국 이 가족의 전부가 달린 일을 미국에서는 게임으로 벌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일으킨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할머니가 와비스케와 가족들에게 남긴 유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시각각 그들을 향해 추락하고 있는 인공위성은 마치 반세기 전 히로시마와 오키나와를 초토화시킨 핵을 연상케 한다. 갑자기 생각난 장면. 영화 초반 할머니는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리던 도중 '내가 당신을 팬건 반세기 전 일이야'라는 대사를 한다. 할머니가 전화를 통해 한 대사들은 다같이 일어나 위기를 극복하자는 내용들이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일부러 코믹하게 쓰여진 부분들도 있었다. 대부분 할머니가 젊은 시절 상당히 억센 기질을 가진 강인한 여인이었다는 점을 부각하는 대사였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해 보면 할머니가 '반 세기' 전에 팼던 일은 과거이므로 잊어도 좋다... 라는 말로 받아들여질만 하다. 생각해 보자. 우리(한국)에게 반세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골방에 처박힌 채 컴퓨터 속 게임에만 몰두하던 킹 카즈마가 러브 머신에게 1차로 패한 뒤 뜨거운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할머니, 죄송해요. 가족을 지키지 못해서...'라고 말한다든가 할머니가 겐지를 보자마자 '나츠키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겠나?'라고 묻는 장면들은 모두 황실과 국민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강요당했던 카미카제의 젊은 대원들을 연상시키는 건 비단 나만 그런 것인가. (흠.. 이건 좀 오바인 것 같기도..)



또 이 영화 속 가족이 여성 중심적으로 묘사된다는 것 또한 곱게 보이지 않는다. 할아버지나 소년 캐릭터가 등장했을 때 영화의 분위기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생각해 보자. 여성은 '도전'이나 '복수'와 같은 단어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할머니의 호전성을 보면 남자 못지 않은 패기를 지닌 여성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러브머신과 맞서 싸운 나츠키 역시 용기있는 어린 세대를 대변한다. 그러나 영화에 나츠키의 부모는 등장하지 않는다. 나츠키의 부모 세대가 바로 전세대가 벌인 일에 책임을 지거나(졌어야 했거나) 일본의 전후 경제 성장을 이끌어온 세대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 그 세대의 여성들은 모두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어 할머니와 나츠키 세대 간에 공백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복수를 위해 떨쳐 일어났던 남자들이 싸움에 실패했을 때 여성들을 전투에 불러들인다. 그리고 모두 힘을 합쳤을 때 비로소 그들은 승리를 하게 된다. 할머니 세대 이후 끊겼던 고리를 어린 세대가 새롭게 물려받아 이을 것을 가만히 권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전 세대, 남녀노소가 전부 합세할 때 그 세력은 최강이 된다.




오바해서 보지 않으려 해도 기모노 입고 고스톱 치며 '미국이 가상세계에 침투시킨 괴물'과 맞서 싸우는 장면들을 보고 있자니 자꾸 이상한 쪽으로 연상이 되는 것을 어쩌랴. 가족애, 물론 중요하고 소중한 가치이다만 그걸 말하는 방법이 썩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의 뼈있는 한 가문이 미국의 '장난삼아 시작된' 엄청난 도전에 맞서서 전 세계인들과 합심하여 이겨냈다는 것이 <썸머 워즈>의 골자가 아닌가.

물론 감독의 의도가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주 조금도 그러한 의식이 개입되지 않았다고는 절대 보여지지 않는다. 잘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작품 곳곳의 수많은 설정이 나의 신경을 자극했던 것이 비단 순전히 개인적인 반일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저 아이들과 함께 보기 좋은 애니메이션으로만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문제적인 작품이 아닌지. '스스로 책임을 지라'는 메시지... 는 듣기엔 좋다만 과연 일본이 역사를 들먹이며 '책임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 먼저 스스로 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