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의 마지막 로맨스>는 혼자 살아가는(단순히 혼자 산다는 의미가 아님을 밝힌다) 사람이 가진 ‘고독’에 대한 이야기다. 서로 다른 과정으로 걸어왔던 두 사람, 하비와 케이트. 영화는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게 되고, 알게 되고, 서로를 위로하게 되어가는 과정을 차분하게 담는다.
피아노를 치고 있는 남자의 모습과 집에 막 돌아온 여자의 모습을 교차시키는 영화의 시작에는 쓸쓸함이 묻어있다. 번갈아 보여주는 뉴욕에 사는 광고 음악 작곡가 하비(더스틴 호프만)와 런던에 사는 리서치 회사 직원 케이트(엠마 톰슨)의 일상적인 모습들. 그들은 뉴욕과 런던이라는 공간적 간격만큼이나 걸어온 길 역시 다르지만, 혼자 살아가는 것에 익숙하다는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이다. 단지 과정이 다를 뿐이다. 하비는 가정을 이루었지만 실패했던 남자고, 케이트는 가정을 이루어보지 못한 여자다.
그들의 직업은 광고와 조사다. 광고는 남에게 더 좋게, 더 예쁘게 만든 이미지를 파는 작업이다. 하비는 광고에서 음악을 담당한다. 보이는 것을 뒷받침하는 들리는 것의 작업. 타인 앞에서 제대로 나서지 못하는 하비의 행동과 유사하다. 케이트의 직업은 남에게 의견을 묻는 리서치다. 그러나 케이트는 묻기만 할 뿐이지 자신의 의견을 대답하는 것에는 서툴다.
원제 <Last Chance Harvey>에서 알 수 있듯, 영화는 ‘마지막’을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하비와 케이트의 모습에는 변화를 두려워하며 머뭇거리다 수많은 기회를 놓치며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이 있다. 하비는 딸의 결혼식에서조차 중심에 서지 못한 채 주변을 서성인다. 무엇인가 할 말이 있고, 해주고 싶은 말이 있지만 표현하지 못한다. 그저 미안한 마음에 지켜볼 뿐이다. 그의 모습은 좋은 남편, 아빠가 되지 못했기에 가지는 미안함과 후회의 결과다. 결혼식에서 조차 기회를 놓치는 하비. 그는 자신의 현실을 놓치기 싫기에 ‘마지막’의 남편과 아빠의 모습을 버리고 직업을 선택한다. 케이트는 모든 일에 간섭하는 엄마 덕에 제대로 데이트 한 번 하지 못하는 인생이다.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도 제대로 표현도 못 하며 망설인다. 그녀의 모습에는 상처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언제나 같은 일상의 모습에 안주한다.
하비와 케이트의 서로 다른 이야기로 전개되던 영화의 흐름은 어느 지점에서 함께 동행을 하게 된다. 중심이 아닌, 주변을 서성이는 사람들이 만난 지점에서 영화는 마지막 기회를 강조한다. 앞으로 살아가는 의미를 찾기 보다는 지나온 의미에 대해 후회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후회와 두려움 속에 살지 말고 마지막 찬스를 잡기 위해 당당히 노력하라는 외침. 영화의 원래 제목 <Last Chance Harvey>에서 나온 마지막 찬스는 남자가 가족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용기라는 의미기도 하며, 의미를 발전해서 남자와 여자가 더욱 긴 여정으로 동행할 수 있음에 대한 희망이다.
사실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는 평범한 중년의 남녀가 느끼는 불안에 대한 평범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분명 시나리오라는 문자적 구조에선 그렇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자 출신들인 더스틴 호프만과 엠마 톰슨의 절제된 연기가 풍기는 품위라는 마법이 만들어낸 이해와 공감의 영화다. 비슷한 듯 하지만 참으로 다른 느낌의 이해와 공감. 학문적인 면으로 이해를 하는 건 책 등의 간접체험으로 가능하다. 반면에 '공감'은 다르다. 내가 살아온 삶의 주름살이 주는 경륜에서 온 공감은 어디서도 배울 수 없다. 결국 내가 살아가면서 배우는 거다.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에서 그걸 보았다. 나이가 들어서 돌아보았을 때 알 수 있을 것 같은 어떤 감정. 이런 부분을 어떤 인위적 상황이나 대사가 없더라도, 단지 존재와 분위기만으로 배우들은 채워주었다. 그들 역시 살아온 나이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마치 <졸업>의 벤자민이 보여줄 수 없었던 것을 하비가 보여주듯 말이다. 비록 젊었던 벤자민의 얼굴은 이제는 늙은 하비지만, 세월을 통해 쌓여진 연륜은 영화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다.
영화에서 연출이 중요하지만 어느 수준을 넘어선 클래스의 배우들은 영화를 빛나게, 그리고 우아하게 만들어준다.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는 그런 경험을 주는 영화다. 왠지 입가에 미소를 띠게 만드는 영화. 나이가 더 들어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다른 무엇을 볼까? 미래와 또 하나의 약속을 지금 했다. 지금 보다 더 늙은 나에 대한 약속.
★★★☆
*2010년10월2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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