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더 로드>의 원작소설을 읽었던 것은 2008년 겨울 경 이었다.원작소설 작가인 코맥 매카시가 유명해서 읽은 것은 아니었다.단지 내가 세상이 다 파괴되는 종말론적 세계관을 즐기는 성격 탓이었다.그 즈음에 <세계대전Z>나 <더 셀>등과 함께 읽게 되었는데,<더 로드>는 아마도 그 연장선상에서 비슷한 기대감을 가지고 고르게 된 소설이었다.
그러나 <더 로드>는 약간은 당황스러운 책이었다.내가 기대했던 것은 종말 이전과 종말이 진행되는 상황이었는데,<더 로드>는 종말 이후를 다룬다.다루는 방식 또한 아주 특이한 문체였다.내가 코맥 매카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소설로 안 보고 영화로만 접했었는데,그 영화의 건조하고 차가운 방식은 정말 인상적이었다.그런데 내가 읽는 소설 <더 로드>는 정말 건조하며 냉정함과 차가움,그리고 고독함이 책 속 가득하게 느껴졌다.종말이 온 이유를 설명도 안 해주며 소설 속 부자가 남쪽을 향해 걷는 구체적 이유도 사실 불확실한 믿음의 여정이었다.단지 따뜻한 곳 일거라는 생각과 마음의 불을 간직한 자들을 찾는 여정.
나름 원작을 흥미롭게 보았던 나로써는 2009년 여름 경에 카트를 끌고 가는 부자의 모습이 담긴 영화 <더 로드>의 스틸사진을 보며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소설을 보면서 상상했었던 카트를 끄는 부자의 모습,그리고 그 주연 배우가 비고 모텐슨.이 정도면 기대를 안 할 수 가 없는 영화였다.이후 공개된 예고편에서의 부자가 나눠 마시는 콜라장면 등은 내가 점점 더 이 영화를 손꼽아 기다리기에 충분한 요소들이 되었고,난 2009년 기대작으로 이 영화의 개봉을 기다려왔다.
사실 <더 로드>는 기대감이 큰 영화였던 만큼,불안감 역시 적지 않았는데 그 큰 부분은 코맥 매카시 특유의 스타일을 영화에서 잘 살려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코엔 형제라는 이미 검증된 분들이 만들어낸 수작중의 수작이었다.하지만 <더 로드>의 감독 존 힐코트는 사실 인지도가 전무하다고 보아도 무방할 필모의 감독이다.그런 그가 원작에서의 정서와 문체를 잘 살려서 영화로 옮겨줄 것인가 하는 점과 영화만의 추가적인 요소를 잘 집어넣어서 새롭게 창조해낼 것인가 하는 점등,불안감을 가지게 했던 질문 역시도 내 머릿속에 적지 않았다.
기다렸던 <더 로드>를 스크린에서 만난 느낌을 먼저 전해본다면 '가벼운 실망감'이라고 말하고 싶다.분명 영화는 수준 낮거나 재미없거나 하진 않았다.아니,꽤 잘 만들어졌다.내가 느낀 가벼운 실망감이란 건 내 기대치에 대한 부분이 컸다.
<더 로드>는 원작을 꽤 잘 살린 영화다.그런데 내가 느낀 실망감은 영화가 원작의 틀을 너무 잘 살려가는 것이 도리어 벗어나지 않고 안주하듯 보인 점 때문이었다.<더 로드>는 원작의 영상화는 꽤 잘 이루어졌지만,소설이 가진 문체 속의 느낌은 다소 미흡하게 전해지는 작품이었다.원작이 보여주는 종말론적인 상황의 틀을 재현한다는 목표에만 너무 충실했던 걸까?
소설 <더 로드>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작품이 되었던 건 단지 흥미로운 설정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저런 설정의 구상은 어려운 것은 아니며 유사한 장르물도 많다.하지만 코맥 매카시가 단어로,문장으로 만들어낸 소설은 차갑고 냉정했다.세상이 다 파괴되어 버리는 과정보다는 이후 남겨진 자들이 느낄 감정에 충실했던 소설.남겨진 자는 세상이 파괴되어지는 과정을 지켜본 자들이다.그래서 행복했던 파괴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슬픔이 있고,다른 한편으로는 파괴되어 버린 세상 속 에서 힘겹게 생존해야 한다.살아남은 것이 신의 축복인가,아니면 악마의 저주인가 묻게 만드는 운명을 가진 자들의 여정이 그려진 소설 <더 로드>.차갑고 냉정한 문체로 그려진 소설을 통해 그 운명을 지켜보는 독자 또한 그 운명의 공동체가 된다.
하지만 영화는 원작의 세계를 영상으로 만들어내는데 조금 더 치중했으며,원작이 가진 차가움을 다소 덜어내고 약간 더 따뜻한 시각을 가미했다.그래도 여전히 냉혹하리만치 차갑기는 하지만,어느 정도 따뜻한 온도를 관객에게 전해주는 방식을 택했다.
원작보다 따뜻함을 택하면서 조금 더 이야기의 친절함과 과거와 현재의 대조를 극대화 하기 위한 방법으로 택한 방법은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한 부인 역의 비중이 커진 점이다.원작에서 가볍게 언급 정도만 되었던 캐릭터였지만,영화에서는 조금 더 과거의 기억을 집어넣어 주인공과의 추억을 만들어 냈다.그럼으로써 종말 직후의 어떤 감정 변화를 가지게 되는지 관객이 조금 더 친절하게 느끼게 해주었으며,살아남은 자가 버리게 될 추억의 무게감을 쉽게 느끼게 해주었다.
길을 걸어가며 자신이 가졌던 삶의 무게를 하나하나 덜어내버리는 주인공,추억이 담긴 사진을 버리고,반지를 버리면서 묵묵히 걸어가는 여정 속에서 그가 아들과 지키고 싶어하며,찾고자 한 것은 불씨이다.그 불씨를 꺼뜨리면 안 된다는 걸 아들에게 알려주면서 "우린 착한 사람이야"라고 말해준다.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한 세계이지만 그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으며,그들이 걷는 여정은 인간으로의 가치와 존엄을 지키기 위한 길이다.
암울하지만 아직은 희망이 있을 거란 믿음을 가지고 마음의 불씨를 옮기는 자들의 이야기인 <더 로드>.
범작과 수작 사이 애매한 위치에 선 작품이란 생각은 들지만 어느 정도 성과는 이루어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원작의 그늘에 조금은 안주한 느낌이 들어 아쉽지만,비교적 원작의 느낌이 잘 전해졌으며 그 세계도 충실하게 잘 그려진 점 등은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원작을 본 분들이라면 어떻게 각색이 되었고,어떻게 영상으로 옮겨졌는지 충분히 확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이며,원작을 안 본 분들이라도 충분히 티켓 값 정도의 가치는 해줄 작품이다.묵시록적인 세계를 다룬 영화라는 무게감보다는 아버지와 아들의 부성애를 중심으로 보아도 충분히 슬픈 영화이므로 감정에 충실하면서 보기에도 좋다.
또 비고 모텐슨,샤를리즈 테론,로버트 듀발,가이 피어스등의 훌륭한 연기자들의 연기력을 보는 것도 충분히 매력적이며,아들 역을 해낸 코디 스미스 맥피의 성인연기자와 견주어 부족함이 없는 놀라운 연기 역시 주목할 만하다.
종말 이후의 세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 <더 로드>.
우리는 이런 세계가 왔을 적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 마음의 불씨를 유지하며 길을 걸을 수 있을까?
*2010년1월7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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