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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없다 (2010, 김형준)_상징과 반전이 만듦새를 용서하게 만든다 (스포일러)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 14.

과학수사대 최고의 실력파 부검의 강민호 교수(설경구). 유일한 가족인 딸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일을 정리하던 그는 마지막 사건을 의뢰 받는다. 바로 금강에서 발견된 토막살해사건. 여섯 조각난 아름다운 여성의 시체, 한쪽 팔마저 사라진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뛰어난 추리력과 행동력을 지닌 열혈 여형사 민서영(한혜진)의 추리로 용의자는 이성호(류승범)로 압축된다.

 이성호는 친환경생태농업을 전파하며 검소하게 살아가고 있는 환경운동가로 지역 주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이다. 형사들에 의해 순순히 경찰서로 끌려온 이성호는 새만금 간척 사업을 반대하기 위한 퍼포먼스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당당하게 진술한다. 이성호의 자백으로 수사는 급물살을 타는 듯 싶지만, 번번이 예상을 빗나가는 증거들로 수사팀은 사건 해결에 애를 먹는다.

 민서영과 강력반 형사들이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강민호의 딸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딸의 실종에 이성호가 관계되어 있음을 알게 된 강민호는 그를 찾아가고, 이성호는 자신이 시체에 남긴 단서와 비밀을 알아낸다면 딸을 살려줄 수 있다며 위험한 거래를 제안한다.

 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시체에 남겨진 단서를 추적해야 하는 부검의와 연쇄 살인을 예고하는 비밀을 간직한 살인마의 피할 수 없는 대결이 시작된다.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희생된 친족에 대한 복수, 그 화살은 또다시 그 복수 대상의 친족을 희생하는 것에 맞춰진다. 내 것이 아닌 아픔에 무심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이기심이 가장 두드러지는 영역이 바로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다. 내 자식 앞에서 한없이 약해질 수 밖에 없고 내 모든 가치, 신념을 버릴 수 있을 때 부모는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이고 무서운 존재가 된다. 그래서 때론 이용당하기 쉬운 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영화의 전반, 왜 저런 얌전하고 개성없는 캐릭터를 굳이 설경구가 연기하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슬슬 들기 시작할 때 비로소 영화는 급물살을 탄다. 강민호(설경구)가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 살해 용의자와 나눈 거래는 자신이 평생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한 함정이었지만 일단 친족이 얽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가 벌이는 모든 모험과 도박이 당위성을 얻는다. 그를 바라보는 불안한 시선(민서영)이 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끝까지 달려간다. 이때 설경구만이 보여줄 수 있는 고유 캐릭터의 강점이 살아난다. 원하는 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집념, 그 투지가 서린 눈빛이다. 그리고 그 눈빛에 맞서 초연함을 끝까지 잃지 않고 차분하게 그 분노를 이용하는 포스는 상대가 류승범이기이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 둘 사이의 신경전이 최고조에 이를 때, 그러니까 급기야 설경구가 딸의 안위를 위해 류승범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우리는 익숙한 장면 하나를 떠올리게 된다. 바로 누나의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건 이우진(유지태)과 15년 간 감금 당하고 결국 자신의 딸을 복수의 도구로 이용당한 오대수(최민식)의 대면 시퀀스(올드보이)다.

류승범의 말대로 용서한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어려운 것. 그러나 용서가 아닌 복수는 남아 있는 자들을 모두 파멸로 이끈다는 점에서 훨씬 비극적이다. <올드보이>의 결말은 오대수가 스스로 혀를 자르고 기억을 지우고 이우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 이성호는 강민호가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절규할 때 그에게 한 마디 던진다. 모든 걸 알게 된 지금부터가 복수의 시작이라고. 끔찍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삶 자체가 복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은 지워지지 않기 때문에 목숨이 끝나기 전까지 복수는 계속 진행된다. 그것을 멈추기 위해서는 삶이 종결되는 수밖에 없다. 모두가 죽음을 맞는 영화의 마지막 반전은 그래서 비통하고 참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종결됨으로써 상처받은 이는 세상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지극히 개인사적인 내러티브에 금강하굿둑이라는 시사적 공간의 배경의 결합은 완벽한 것처럼 보인다. 사지가 잘린 강줄기와 개발이란 명목하에 환경을 훼손하는 집단들이 있다면, 이미 숨이 끊어져 권리를 상실한 시체와 과학적 증거를 위해 시체를 절단하고 꼼꼼하게 뜯어내는 부검의란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들 각자의 명분은 정확하게 대치된다. 동시에 그 안에 엄연하게 존재하는 권력 불균형은 묵인된다. 이 모든 상징을 복수에 응용한 이성호는 무척 감성적이면서도 예술적 기질마저 엿보이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의 복수는 끔찍했지만 한편으로는 로맨틱하기까지 했다. 물론 영화니까 감히 이런 수식어가 가능한 것이겠다만. 영화 속 충격적인 반전은 끔찍하게 아름답게 치장되어 있어 더욱 섬찟하다. 여기에서 여성의 아름다운 신체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아이 러브 비너스라는 환경단체 수장이었던 이성호는 신화 속 여성인 비너스의 모습에서 말이 없는 여인의 절단된 신체, 그 아름다움의 이중적 의미를 포착한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비너스의 절단된 신체를 보고 아름다움을 논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이성호는 현실 속에서 그로테스크하게 재현한다.

 이렇게 이 영화는 비너스라는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여성=금강=자연을 드러내고, 남성들의 쾌락에 이용당한 채 버려진 여성의 신체와 말없이 인간에게 변형당하는 자연의 모습이 겹쳐 보이도록 한다. 한편 그 안에는 욕구에 따라 '창녀'를 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을 손가락질하는 이중적인 남성들의 심리가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물론 이성호 역시 성녀와 창녀, 아름다움과 추함의 의미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사적인 기억과 피해의식으로 왜곡된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동네 사람들이 누나를 '창녀'라고 손가락질했다는 이성호의 울부짖음이나 '우리 애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며 항변하는 이성호의 아버지의 모습, 그러나 정작 영화 속에서 창녀는 끔찍하게 죽은 친구의 복수를 도와 몸을 이용할 줄도 아는 여자로 그려진다.

 (물론 그러한 의도 역시 자신과 각별한 관계인 여성(딸)을 구하기 위한 '아비'라는 남자의 이기심에 의해 이용당하긴 했지만.) 금강하굿둑은 금강 주변의 주민들에게만 소중한 존재였고 삶의 터전이었지만 그 외 사람들에게는 관조의 대상이거나 멀리 떨어져 있어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비춰진다. 아름다움과 끔찍함에 대한 상대적 잣대는 이렇게 그 대상이 나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느냐가 기준이 되며 그것을 판단하는 과정에서 개입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이기심은 갈등과 복수를 불러일으킨다.

결국 인간은 신이 되지 않는 이상 절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는 존재이다. <밀양>에서 신애(전도연) 역시 자신이 범인을 용서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결국 더욱 극심한 스트레스와 정신병에 시달리고 말았던 것처럼. 인간은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래도 인간에게 '죽음'이 허용되어 있다는 것이 희망이 될 때가 있다. 죽음만이 용서와 복수의 경계를 없애고 끔찍한 기억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써놓고 보니 굉장히 난해하다.. 날 잡아서 다시 써야 할 듯 ;;)

그래도 영화에서 몇 가지 거슬렸던 건 영화 전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던 구어체의 대사들과, 명색이 한국 최고 부검의인데도 불구하고 사체의 나이대 정도도 가늠하지 못하더라는 정도의 오류랄까.. 하지만 간만에 뒷목 뻐근한 반전을 제공했다는 점만으로도 꽤 오래 기억하게 될 듯한 영화. 설경구와 류승범이 동시에 선택한 영화라니 역시 그럴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혜진은 아직 영화 연기는 역부족인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