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웨이 위고 - 샘 멘더스 |
영화를 보러 너무 먼 고행길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극장까지 30여분 걸었다!!) 조금 툴툴거리며 극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 영화도 나름대로 로드무비의 성격을 띠고 있으니, 떠날 때 마음과 영화를 본 후 집으로 돌아올 때 나의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과정과 조금 비슷했다고 해야 할까. 이럴 때 우리는 '한 뼘 성장했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결혼은 하지 않은 오래된 커플, 하지만 언제나 신혼같고 여느 부부보다도 견고한 신뢰와 사랑을 끊임없이 나누고 있는 그들. 임신을 한 이후 다소 예민해진 베로나(마야 루돌프)는 자신들의 삶이 잘못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아기를 낳아 기를 수 있는 완벽한 보금자리를 찾아 둘은 함께 여행을 떠난다. 영화 속에서 그들이 차례로 만나는 사람들은 바트의 부모님, 베로나의 옛 직장 상사, 베로나의 동생, 옛 대학 동창, 바트의 형 등이다. 이들은 저마다의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데리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바트와 베로나가 꿈꾸는 완벽한 가정의 모습은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결말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쯤 하자 없이 완벽한 가정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모두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껴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남편 혹은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지지고 볶아 가며. 앞으로 어떠한 일이 둘 사이에 일어날지 모르지만 이 커플의 결론은 현명하다.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이 아기에게 잘해주는 것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 지금까지 그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무난하고 상식적인 여행기에 그칠 뻔한 이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는 일등공신 캐릭터는 단연 바트 역의 존 크래진스키다. <사랑은 너무 복잡해>에서도 꺽다리 예비사위 역으로 실제인지 연기인지 구분할 수 없는 리얼한 생활코믹 연기를 선보였던 그는 이 영화에서 임신한 여자친구에게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면서도 끊임없이 그녀를 웃게 만드는 엔돌핀 메이커 역할을 한다. 이 커플이 만나는 다양한 부모상 역시 하나같이 특이하고 개성이 넘친다. 아이들 앞에서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엄마나 아기를 유모차에 절대 태우지 않고 아기 앞에서도 섹스를 하는 히피 부부, 다양한 인종의 아이들을 입양해 다국적 가정을 꾸렸지만 정작 임신을 하지 못해 남몰래 고민하는 부부, 집나간 아내 때문에 혼자 사춘기 딸을 키울 걱정에 부딪힌 아빠 등 이들은 저마다의 사연과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가정'이라는 굴레를 움켜쥐고서. 하지만 그게 싫고 두렵다고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운, 우리가 혹시 루저는 아닐까 고민하는 '서른 넷' 커플이지만 그 어떤 집보다도 훌륭한 부모가 될 수 있을 것이란 걸 관객도, 그리고 영화 속 바트와 베로나 역시도 알고 있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여행의 마지막 밤에 둘은 서로의 곁에서 평생 함께 할 것을,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고, 힘들 때 같이 힘들어 해주고, 미시시피 캠핑 가는 것도 허락해주고,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어 주는 공예를 지지해 줄 것 따위와 같은 시시콜콜한 조항을 내걸며 서로 굳게 약조한다. 그것이 혼인신고를 하거나 성혼 선언이나 주례사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보다 나약한 것일까? 사랑을 증명하고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방법은 그렇게 의외로 쉽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로 형성되는 유대감에서 출발하는 사랑,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릴 때 옆에서 가만히 안아줄 수 있는 사랑이야말로 견고한 것이다.
영화 사상 가장 사랑스러운 남편감인 바트와 친구들이 벌이는 대사발 날리는 코미디는 기발하고 유쾌하다. 엽기적인 부모도 있고 이기적인 자식사랑법에 집착하는 부모도 있다. 애잔한 사연도 있고 옆에서 지켜보기에 갑갑한 집안도 있다. 사실 꼭 다른 부모나 집안을 '롤모델'로 삼아야 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마지막으로 베로나의 고향 집을 찾아간 둘은 그들이 그토록 찾았던 완벽한 보금자리가 그 곳이라는 걸 알게 된다. 낡았지만 베로나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 아이에게 바다를 보여줄 수 있는 그 곳이야말로 아이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이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아메리칸 뷰티>와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찍은 샘 멘데스 감독이라는 사실은 조금 의아하기도 하다. 극적인 플롯으로 쨍한 여운을 남기던 그가 이렇게 힘을 쭉 뺀 베스트극장 같은 영화를 찍다니. 이토록 아기자기하고 담백한 코미디 로드무비라니. 하긴 거대서사에서 미시사로 눈을 돌렸다고 하더라도 이 영화 역시 '이상적인 가정상'에 대한 고민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기는 하다. 결핍된 것 투성이인 듯 하면서도 둘이 만족할 수 있는 가정을 만드는 과정이 결코 어렵지 않다는 낭만적 희망을 주려고 했던 것일까. 그간 그가 관객들에게 던졌던 절망과 어두운 가정생활을 둘러싼 고민들에 대해 사과라도 하는 듯이.
결혼하기 전, 혹은 아이를 낳기 전에 커플(반드시 부부가 아니더라도 좋다)이 함께 보면 좋을 영화. 특히 바트와 같은 남편상을 원한다면 꼭 권해 함께 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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